[가리사니] 축제의 끝에서

입력 2022-02-21 04:06

장면 하나. 패딩 점퍼를 두른 육중한 몸매의 한 남자가 경기장 단상에 나타나자 관중의 환호가 쏟아졌다. 양손에 붉은 솔을 든 공연단 소녀들이 그를 향해 열렬히 두 팔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세계 체육계 수장 격인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도 그에게 연신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받은 남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개회를 선언하자 셀 수 없이 많은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다. 지난 4일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시작하던 순간이다.

장면 둘. 다른 선수의 점수가 자신보다 높게 발표되자 한 빨간 머리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고함을 질렀다. 불과 몇 분 전 화려한 4회전 점프를 수차례나 보여준 뒤 만족하며 미소 짓던 모습과 딴판이었다. “당신들은 다 알고 있었어! 난 당신들 전부 증오해!” 절규한 이는 러시아올림픽위원회 소속인 만 열일곱의 알렉산드라 트루소바였다. 지난 17일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20일 폐막식을 끝으로 베이징에서 3주간의 취재 일정이 마무리됐다. 만만치 않은 여정을 탈 없이 마쳤다는 안도감도 있지만 대회 내내 숙소와 경기장을 둘러싸던 녹색 격리벽에서 벗어난다는 감개무량함이 더 크다.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위의 두 장면만은 이번 대회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오래 기억할 듯하다. 같은 대회 안에서도 다른 공간, 다른 시간의 두 장면이지만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같다. 올림픽이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열리는 축제인지다.

근대 올림픽은 체제 선전의 도구로 빈번히 쓰였다. 노태우 정권은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체제를 공고히 하고 서방 자유주의 진영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나치 독일 역시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국가권력을 다지고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썼다. 꼭 개최국이 아니더라도 각국은 냉전시대 체제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올림픽에서 적국을 이기려 애썼다. 선수들의 땀과 성취도 이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베이징의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기자실에 배포된 영어신문은 시 주석의 업적과 중국 선수들의 영웅적 모습을 찬양하는 기사로 도배됐다. ‘중국-홍콩’이 적힌 옷을 입은 이들을 마주치고 느낀 뜨악한 감정도 잊기 어렵다. 55개 소수민족을 개막식에 굳이 등장시킨 것, 인권 탄압의 피해 당사자인 위구르족 선수를 성화봉송자로 넣은 일도 그렇다. ‘함께 미래를 향해(一起向未 )’라는 구호가 과연 인류 공통의 꿈을 의미하는 건지, 중국 내부 결속을 뜻하는 것은 아닌지부터 의심이 들었다.

동계올림픽의 꽃이라는 피겨스케이팅에서 벌어진 사건도 사실 같은 맥락이다. 러시아는 금메달 획득을 통한 체제 선전을 위해 어린 선수들에게 해로운 약물을 쓰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은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피겨 선수 개인보다는 그런 일을 무심히 자행하는 국가 체제 그 자체다. 트루소바의 절규는 그렇게 많은 것을 희생당하면서도 목표를 이루지 못했기에 나온 비명에 가깝다.

스포츠에는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는 힘이 있다. 김연아가 올림픽 시상대에 섰을 때 피겨 불모지이던 한국에서 유영, 김예림처럼 수많은 ‘김연아 키즈’가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빙속여제’ 이상화가 아시아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 올림픽 2연패를 이뤘을 때 한국 빙상은 새 역사가 열렸다. 한 선수의 도전이 수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고, 선수가 한계를 넘을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본다.

이번 올림픽에서 세상은 연대하기는커녕 갈라섰고, 또 같은 편끼리 뭉치기 위해 스포츠를 이용했다. 어쩌면 이번 대회 자체가 우리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제 올림픽의 의미를 새로 정의해야 한다. 근대 올림픽이 지난 세기 국가주의의 파국을 막자는 숭고한 목적으로 시작했듯 우리는 스포츠의 가능성으로 세상을 어떻게 더 나은 곳으로 만들지 고민해야 한다.

조효석 문화체육부 기자 베이징=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