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변종하 부친 덕에 컬렉터 입문… 2대에 걸친 인연

입력 2022-02-20 20:58
1980년대 무렵 컬렉팅에 입문한 이건희 회장은 당대 최고 인기 화가 변종하의 작품을 사 모으면서 그의 스승 서진달의 작품까지 수집했다. 사진은 이건희 컬렉션이었던 변종하의 ‘오리가 있는 풍경’(1976, 85.7×85.7㎝, 캔버스에 유채). 대구미술관 제공

요새 최고 인기 작가로 이우환(86) 박서보(90) 하종현(86) 등을 꼽을 수 있다. 단색화(단색의 추상화) 작가군으로 분류되는 이들 원로 작가는 2012년부터 주목받기 시작해 미술시장이 뜨거운 요즘 상한가를 구가한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박서보 하종현 작가의 경우 성질 급한 컬렉터들이 작업실로 직접 찾아간다.

지금 이들이 그런 것처럼 1980년대는 구상화 작업을 하던 변종하(1926∼2000) 권옥연(1923∼2011) 김흥수(1919∼2014) 박고석(1917∼2002)의 시대였다. “이 가운데 변종하는 권옥연과 함께 인기 O순위였다. 너무 잘 팔려 전시 물량이 없다 보니 화랑들이 발을 동동거렸다”고 샘터화랑 엄중구 대표는 기억했다.


고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변종하 작품 2점이 대구미술관에 기증돼 지난해 전시회 때 대중에 공개됐다. 작가의 필치가 무르익던 시기에 그려진 ‘오리가 있는 풍경’(1976년)과 ‘두 마리 고기’(1980년)인데, 모두 새 꽃 물고기 등을 단순화한 형상을 통해 서정적이면서 문학적 서사가 있는 화면을 구사하는 변종하식 부조 회화(평면상에 형상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나는 단순해지고 싶다. 그리고 결코 심각하지 않은 마음으로 아주 원시적인 유머를 느낄 수 있는 화면, 설명하지 않아도 금방 친숙해질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작가는 생전 이렇게 밝혔다. 그 소망대로 단순한 형태, 유려한 선, 부드러운 색감이 특징인 이들 작품을 보노라면 마음이 맑아지고 따뜻해진다. 부조식 회화라 그런지 그의 작품은 찰흙을 갖고 놀던 유년의 기억을 건드린다. 캔버스 표면에 나무판이나 석고로 형태를 만들어 붙인 뒤 그 위에 천을 덮어 채색하는 요철 기법은 프랑스 유학 시절에 탄생했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변종하는 6·25전쟁 직후인 1954년 상경해 홍익대, 수도여자사범대(현 세종대) 등에 출강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54년과 55년 거듭 특선한 데 이어 56년에는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국전 추천작가로 활동하며 중앙무대에 뿌리내리기 시작할 즈음인 60년 그는 돌연 프랑스 유학을 감행했다. 이미 한 번 만주로 유학을 다녀온 이후인데 말이다.

파리에선 소르본대학에 적을 두고 서양화를 공부했는데 그곳에서 운 좋게 화상 르네 드루엥의 눈에 들었다. 드루엥은 현대미술사에 나오는 거장 장 드뷔페, 장 포트리에를 발굴한 거물급 화상이었다. 드루엥은 그에게 “남이 못하는 기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격려했고 그렇게 해서 창안한 게 요철 기법이다. 파리에서는 전후의 불안한 내면을 표출하는 추상화인 앵포르멜이 득세하는 가운데 구상회화의 일종인 신형상주의가 막 형성되고 있었다. 변종하도 새로운 흐름에 맞춰 추상화가 아닌 구상화 화가의 길을 걷는다.

그는 특이하게도 해방 직전 만주 신경의 신경시립미술원 서양화과에서 공부했다. 학맥에 따라 뭉치는 화단에서 어느 그룹이나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했지만 인기를 구가한 그를 미술평론가 황인은 ‘리베로(자유인)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미술품을 수집한 이건희 컬렉션에 당대 최고 인기 작가였던 변종하의 작품이 있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기증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니라 대구미술관이다. 변종하가 대구 출신 작가임이 고려됐겠지만 더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있다.

도자기를 감상하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그는 변종하의 부친인 서예가 변해옥으로부터 서화를 선물 받은 게 계기가 돼 고서화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자료: 도록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웰컴홈 향연’

변종하의 부친인 서예가 석정 변해옥이다. 대구 서문시장 북쪽에서 한림서도원을 운영한 그는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1910∼1987)과 교유했다. 이병철은 38년 서문시장 근처 인교동에 250평 남짓한 점포를 사서 삼성상회 간판을 걸었다. 이것이 훗날 대한민국 1위 재벌 삼성그룹으로 성장한다. 그때 삼성상회가 만들던 별표국수는 서민의 허기를 채워준 주식으로 사랑받았다. 삼성상회는 39년 양조업에 착수했다. “조선양조주식회사가 만든 청주 월계관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나는) 어느덧 대구에서 굴지의 고액 납세가가 됐다”고 이병철 저서전 ‘호암자전’은 전한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사업 확장을 하던 이 시기, 30대 초반의 이병철은 컬렉터로도 나섰다. 고서화나 신라토기, 고려청자, 조선백자, 불상 등에 매료돼 수집을 시작한 그는 점차 철물, 조각, 금동상 등으로 범위를 넓혀갔다. 그 계기를 마련해준 이가 변해옥이다.

이병철은 그 계기와 관련 “우리 동네 어른인 석정 변해옥 선생에게 서화를 선물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게 하도 좋아서 서예를 시작하게 됐다”고 기자의 질문에 답한 적이 있다. 서예에 대한 관심이 고미술 수집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 변종하 컬렉션은 이건희 회장에겐 자신에게 컬렉터 DNA를 물려준 부친 이병철 회장에 대한 추억을 소환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속 ‘마들렌 과자’ 같은 게 아니었을까.

변종하를 있게 만든 스승은 누구였을까. 이건희 컬렉션으로 대구미술관에 기증된 대구 화가 서진달(1908∼1947)의 작품 2점이 그 답이다. 서진달은 일제강점기 일본 도쿄미술학교 유학을 다녀온 1세대 서양화가였지만 지병인 폐결핵으로 39세로 요절했다. 서진달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인물 중 한 명인 서병규의 손자로 태어났다.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40년 일본에서 갓 돌아온 30대 초반의 젊은 화가 서진달은 대구 최고의 사립 명문 계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고 미술부에서 변종하 백태호 김우조 등을 가르쳤다.

“나는 동경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미술 공부를 해왔다. 너희들은 열심히만 공부하면 몇 개월 동안에 전부 가르쳐 주겠다. 내 말만 들으면 틀림없이 세계적인 대화가가 될 수 있다.”

변종하도 스승의 열정을 수혈받은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서진달은 42년 만주 하얼빈공대에서 강사를 지내며 43년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광폭 행보를 했다. 변종하가 일제강점기 말 징집을 피해 신경시립미술원에서 유학한 것은 스승의 주선 덕분이었다.

서진달의 '누드'(1938, 80.4×53.4㎝, 캔버스에 유채). 대구미술관 제공

서진달은 아카데믹하면서 인상주의적인 화풍의 누드화가 트레이드마크다. 대구미술관에 기증된 2점도 누드화다. 한 점은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한 해인 34년 그린 것으로 동양 여인의 신체 비례에 맞춰 여체의 볼륨감을 과감하게 표현했다. 부산동래고보를 졸업한 이듬해인 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기량이 엿보이는 수작이다.

다른 작품은 도쿄미술학교 재학시절인 38년 그린 것으로 앞선 시기에 그린 작품보다 훨씬 대담한 필치와 명암구분, 형태감이 확실한 윤곽선 처리를 통해 대상의 존재감을 부각한다. 요절한 탓에 지역화가로서만 기억되는 서진달의 작품을 소장했다는 것은 이건희 컬렉션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은 “중요한 작가인 변종하의 작품을 모으면서 스승까지 찾아서 계보를 갖추려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