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옳으니이까.” 책망을 들은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을 향해 던진 질문이었다. 누이동생 디나가 히위 족속의 추장 세겜에게 추행을 당하자 야곱의 아들들은 그 성읍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모든 재물을 노략했다. 옳음과 정의에 대한 질문은 인간에게 아주 본질적이고 중요한 질문이지만 이 질문이 중심이 되면 언제나 갈등으로 시작돼 분쟁으로 치닫다가 전쟁으로 이어진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했다. 살기등등해 몰려든 군중 가운데 돌멩이를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죄를 싫어하고 악을 가장 미워하는 예수조차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예수는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그 원수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빌었을 뿐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랑인가”라는 질문이다. 성경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정의로워도 사랑이 아니라면 불완전한 정의일 뿐이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랑에 이른다고 말했다. 알베르트 카뮈는 “나는 단 한 가지 책임만 아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의 절대적 가치는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온 인류의 보편적 상식이다. 어떤 옳음도 어떤 위대함도 사랑 앞에서 굴복한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언제나 인간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조차도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가치는 아니다. 사랑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가”이다. “보기에 좋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다. 아름다움은 정의보다, 사랑보다 더 우선되는 질문이 돼야 한다. 사랑이 아무리 위대해도 정의롭지 못한 사랑은 아름답지 못하다. 오늘날 세상에는 사랑의 이름으로 배신하고, 이혼하고, 갈라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에는 너를 사랑했지만 지금은 다른 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사랑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고 당당히 말하고 떠나는 것이다. 그런 사랑은 아무리 진실하다 해도 아름답지는 않다.
반대로 아무리 정의로워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아름답지 못하다. 한때 정의를 외치고 불의와 싸웠던 사람들이 외면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한 정의가 진정한 사랑 때문이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정과 상식을 주장해도 그것이 가족이나 편당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결코 아름답지 못한 정의일 뿐이다. 예수는 사랑과 정의를 함께 세우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 그래서 그 피묻은 십자가는 가장 아름답게 빛나서 온누리를 밝히고 있다.
사랑과 정의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하며, 관대하고 온유해야 한다. 자신의 사랑이나 정의로움이 교만으로 연결되면 추해지기 시작한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 혼을 불태우며 싸웠고, 정의를 위해 청춘을 바쳐 헌신했다 해도 겸손히 자기를 낮추며 관대하고 온유하게 상대를 대하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이 일관성이 있다는 것도 좋지만 변화와 성장과 성숙은 더 아름답다. 생각이 단순한 것도 좋지만 다양한 것은 더 아름답다.
대통령선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선거 생리가 그렇게 돼 있는지 온통 들리는 소식은 옳고 그름에 대한 것뿐이다. 온갖 비밀들이 다 폭로되고 악한 의미를 덧씌워 상대 죽이기에 혈안이 돼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이 옳은 것입니까’라는 질문에서 ‘무엇이 나라를 위한 진정한 사랑입니까’를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누가 더 아름다운가를 분별해야 한다. 온전한 사람은 없다. 복음주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 정의와 사랑과 아름다움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아름다움이니라. 성경에 있는 말은 아니다.
유장춘(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