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한 살 터울인 동생은 일찌감치 결혼해 애를 낳았다. 귀여운 조카는 건강하게 쑥쑥 자랐지만 종종 밥투정을 해서 부모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가족 모임 때는 “한입만 더 먹을까? 자, 입으로 비행기 들어간다, 피융” 하고 무슨 전술 유도탄처럼 제 아빠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먹이려 애쓰더라.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무심코 한마디 했다. “놔둬,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그랬더니 한숨과 함께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애 낳아봐라, 그게 말처럼 쉽나.”
오래전 일인데 동생의 말이 내내 머릿속에 남았던지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아침잠이 많아서 늦게 일어난 나. 그래도 밥은 먹고 가라는 엄마. 거기에 대고 왜 안 깨웠냐고 신경질을 부리며 집을 나서는 나. 우유를 들고 부리나케 따라오는 엄마. 이거라도 먹고 가, 싫어 지각이라니까, 좀 늦어도 괜찮아, 빨리 가야 돼…. 실랑이를 벌이다가 마지못한 척 한 모금 마시고 뛰어가는 나는, 내가 봐도 밉살스러운데 엄마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엄마는 장사를 시작했다. 미도파백화점 뒤편 시장통이 일터였다. 거기서 칼국수를 만들었다. 하지만 가게가 잘되자 임대인이 비워 달라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옮겨야 했다. 대전으로 내려간 엄마는 학교 앞에 분식집을 차렸다. 손님이 다섯 명만 와도 꽉 차는 공간이었다. 이후로 감자탕도 팔고 파르페도 팔고 김밥도 팔고 고기도 팔다가 혀의 감각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낄 때쯤 완전히 손을 뗐다. 더 이상 장사를 하진 않았지만 엄마는 쉼 없이 음식을 했다. 김장을 하고 식혜를 담그고 해가 바뀌면 나물을 무쳤다. 결혼한 동생 집에도 결혼하지 않은 내 자취방에도 밑반찬이 끊임없이 공수됐다. 엄마는 특히 설과 추석에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다양한 요리를 선보였다. 준비하려면 며칠이 걸렸을 텐데.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지난해 겨울 엄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졌다. 입원해 있는 동안 옆을 지키며 나는 귀신의 집에 들어간 아이처럼 몇 번이나 까무러칠 뻔했다. 검사를 위해 피를 뽑을 때마다 엄마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병명은 밝혀졌지만 의사는 내게 말했다.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진통제를 계속 먹지 않으면 삶의 의지가 꺾일 정도로 아픈 병이란다. 그럼에도 명절 상차림은 그대로, 아니 더욱 풍성해졌다. 차라리 외식을 하면 어떻겠냐고 말해 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일본 도쿄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는 노부토모 나오코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치매에 걸린 엄마의 모습을 남겨야겠다 결심하고 만들었던 영화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와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에세이에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고향 집에 오는 것을 엄마는 ‘모처럼의 중요한 날’로 여기고 있었구나. 엄마가 건강하던 때에는 일 년에 한 번, 설날에만 내려갔다. 그게 엄마의 인생에 있어서는 중요한 날이었구나. 분명 그날을 위해 무엇을 해 먹일지 이것저것 생각하며 기운 넘치게 준비해 놓고 만전의 태세로 마중을 나와 주었다. 일 때문에 내려가지 않은 설날도 있었는데. 그해 설날 엄마는 외로웠겠지. 아버지와 둘이서 설음식을 먹으며 ‘나오코는 설 잘 보냈으려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겠지.”
나오코가 엄마를 촬영하는 이런저런 장면을 마주하며 여러 번 눈물을 흘렸는데 왜 그랬는지 내 감정을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다. 다만 읽기를 마치고 나니 비로소 나도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놔두자. 아직 할 수 있는 일을 걱정된다는 이유로 못 하게 하지는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엄마, 앞으로도 엄마가 하고 싶은 음식은 전부 다 해. 감사히 맛있게 먹을게. 엄마 요리는 최고니까. 전에도 최고였지만 지금도 최고야. 대신 살쪘다고 타박하시면 곤란합니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