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권리를 e롭게… 지구에 더 이롭게

입력 2022-02-19 04:02

매번 선거가 끝나면 뜨겁게 달아올랐던 선거 운동의 흔적인 후보자 현수막과 벽보, 공보물 등은 처치 곤란한 쓰레기로 전락한다. 선거 때마다 한바탕 ‘쓰레기 전쟁’이 되풀이되고 있지만 물량공세식 구시대 홍보전은 수십년째 제자리걸음이다. 환경단체들은 제20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현행 선거운동 방식을 쓰레기 배출을 최소화하는 ‘디지털 녹색 유세’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탄소중립 역행하는 낡은 선거운동

정부는 3월 9일 대선을 앞두고 폐기물 처리 대책을 강화하고 있다. 올해는 6월 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도 치러질 예정이어서 선거로 인한 쓰레기 배출 우려도 큰 상황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18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이번 주부터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선거용 인쇄물 분리배출·폐현수막 재활용 지침’을 배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환경부 지침에 따르면 선거 때 쓴 현수막은 공직선거법에 따라 정당·후보자 등 설치자가 선거일 후 바로 철거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2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정당·후보자가 지자체에 폐현수막 수거를 요청하면 지역 재활용 업체나 사회적 기업 등이 폐현수막 원단을 무료로 가져갈 수 있다. 책자형 공보물 등은 종이류로 분리해 배출하고 코팅 종이는 종량제 봉투에 담아 버려야 한다.

선거 이후의 환경오염 문제는 고질병처럼 되풀이됐다. 2017년 제19대 대선 당시 후보자의 종이 공보물이 약 4억부 배포됐고 현수막 발생량은 5만2500장을 웃돌았다. 2018년 제7회 지방선거 땐 벽보 104만부, 종이 공보물 6억4650만부, 현수막 13만8192장이 발생했다. 현수막을 모두 합친 길이만 1381㎞에 이른다. 독도에서 중국 베이징까지 거리(1373㎞)보다 길다. 반면 공보물 대부분은 재활용되지 못하고 그대로 버려지는 실정이다. 2020년 4·15 총선과 지난해 4·7 재보궐 선거 때도 수만장의 현수막이 사용됐음에도 재활용률은 25% 안팎에 불과했다.


현수막은 폴리에스터와 면 등으로 만든 합성섬유다. 제작·설치비용은 1장당 10만원이고, 처리비용은 t당 30만원 정도다. 현수막 소각 과정에선 이산화탄소와 다이옥신, 미세 플라스틱 등이 대기 중에 배출된다. 현수막 1장당 온실가스 배출량은 6.28㎏으로, 2020년 4·15 총선 때 쓰인 현수막 3만580장의 온실가스 배출량만 약 192t이었다.

30년산 소나무 약 2만1100그루가 한 해 동안 흡수해야 하는 이산화탄소량과 맞먹는다.

선거철 폐기물 처리 문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제기됐지만 관련 규정은 오히려 역행했다. 2018년 3월에는 공직선거법이 개정돼 현수막 사용 가능 매수가 선거구 내 읍·면·동마다 1개에서 2개로 늘었다. 이를 근거로 제20대 대선에서는 제19대 때보다 2배 많은 현수막(10만5090장)이 사용될 거란 전망이 나온다. 2010년에는 후보자 선거사무소의 간판·현판·현수막 수량을 제한하는 규정도 삭제됐다. 후보자 선거사무소 외벽이 형형색색 현수막으로 도배된 것도 이때부터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선거 때 현수막이나 벽보 등을 거의 활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도시 경관을 해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후보자들이 지역별로 선거 부스를 꾸리고 거리에서 볼펜·사탕 등을 나눠주거나 페이스북·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주요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많다.

쓰레기 전쟁, 친환경 대안은 없나

게티이미지뱅크

환경부의 지침은 이미 발생한 폐기물을 처리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어서 환경오염을 줄이는 근본 대책과는 거리가 있다. 정당이나 후보자가 지자체 측에 폐기물 수거 책임을 떠넘기는 수단으로 활용할 거란 지적도 나온다. 이에 환경단체들은 현수막·벽보·공보물 등 배포 수단을 디지털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허승은 녹색연합 녹색사회팀장은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95%에 이르고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사회로 전환되면서 전 국민이 스마트폰으로 QR코드 인증, 지역별 확진자 발생 현황, 방역지침 등을 확인하고 있다”며 “종이 공보물을 집마다 발송하던 관행을 깨고 전자형 공보물을 원하는 유권자에게 온라인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디지털 약자나 종이 공보물을 원하는 시민에 한해서는 알권리 보장을 위해 기존 방식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게 허 팀장의 설명이다.


녹색연합이 2020년 4월 ‘선거철 쓰레기 해결을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이라는 주제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더라도 응답자의 43%는 ‘종이사용 최소화, 온라인 공보물로 전환’을 지목했다. 재생 종이 사용 의무화(34%), 현수막 규격·수량 제한(13%), 현수막 재활용 의무화(6%), 어깨띠·옷·재활용 등 기타 물품 재활용(4%)이 뒤를 이었다. 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각 후보의 선거 공보물을 100% 재활용 가능한 재질의 ‘책 한 권’ 형태로 받고 싶다는 글도 올라와 있다.

‘디지털 녹색 유세’를 뒷받침할 공직선거법 개정안도 국회 계류 중이다. 지난해 8월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세대원 모두가 전자 방식으로 공보물 받기를 원하면 책자형 선거공부를 발송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선거 때 사용되는 공보물·벽보·명함·투표안내서 등을 재생 종이로 한정했다. 엄태영 국민의힘 의원은 선거 때 쓰는 현수막을 재활용 쉬운 재질과 구조로 제작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개정안들은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전체 회의 안건으로 상정되진 못했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스마트폰 앱이나 문자를 이용하면 기존보다 더 많은 사람이 후보자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회의원들이 앞장서서 일회용 공보물 배포 등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어줘야 하지만 정작 본인들도 (선거 때)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쉽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최재필 기자 jp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