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말만 해서는 제왕적 대통령 못 버린다

입력 2022-02-16 04:20

또 나온 대통령 권력분점 주장
식상하지만 해결해야 할 숙제

법·제도 한계 핑계대기 앞서
의지만 있었다면 가능했던 일

모든 것을 한다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 약속 지키는 후보 되길

이번 대선에도 권력구조 개편 주장이 어김없이 나왔다. 수 십년째 5년마다 되풀이되는 식상한 메뉴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 주요 후보들의 공약에는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나누는 묘안이 빼곡하게 들어있다. 진영에 따라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하는 세상인데도 소속 정당과 지지 기반이 다른 후보들이 한목소리를 낸다. ‘못할 일이 없고, 모든 것을 해야 하는 제왕적 대통령’을 바꾸자고 한다. 주장이 너무 똑같아서 이상할 정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임기 4년의 중임 대통령제 개헌을 앞세웠다. 동시에 국회의 국무총리 추천, 총리의 각료 추천권 보장, 감사원의 국회 이전을 약속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궁궐식 청와대 해체라는 공약도 핵심은 권력 분점이다.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한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가 연상된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국가원수가 아닌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국회와 사법부를 뛰어넘는 권력을 쥔 대통령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대통령의 총리·내각 추천권을 국회로 이관하겠다고 했다. 후보들이 이런 약속을 할 때 앞뒤에 반드시 등장하는 단어가 제왕적 대통령 극복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문 대통령 역시 제왕적 대통령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cy)이라는 말은 미국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가 닉슨 행정부를 분석하며 처음 사용했다. 행정부의 권한이 입법부와 사법부를 압도해 삼권분립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비꼰 말이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포함한 헌법기관의 장을 임명하는 한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제도적 허점이다. 해결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더 강화하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무력사용권(AUMF)이라는 대통령의 권한을 스스로 제한하고 의회에 시리아를 공격해도 좋을지 물었다. 의회는 즉각 하던 일을 멈추고 머리를 맞대 합의를 이뤘다. 언론은 이를 제왕적 대통령의 종식이라고 평가했다. 정적과 대놓고 싸우지 않고 조용하게 대통령의 권한을 줄인 것은 지금도 오바마의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독재자 대통령을 오랫동안 경험한 우리에게 제왕적 대통령은 미국에서처럼 단순한 경계의 대상만은 아니다. 오히려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역사적 과제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너무 어렵게 생각한다. 제도에만 매달리고 있다. 1987년 헌법의 한계 때문이라며 개헌만이 해결책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누가 어떤 노력을 했기에 제도적 한계를 말하는 건지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문 대통령은 좋은 기회를 놓쳤다. 청와대 관저에서 비선 실세와 국정을 논했던 전임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나서 파면시킨 뒤 선출된 대통령이다. 겸손한 성품과 따뜻한 배려는 감동을 줬다. 힘이 있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나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팬덤의 유행어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이런 대통령은 앞으로 한동안 나오지 않을 듯했다. 문 대통령도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취임사 첫머리에 ‘권위적 대통령 문화 청산’과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 나누기’를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구차하다. 국민과 소통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다. 5년 전에는 문 대통령이 ‘궁궐식 청와대’라는 비난을 받고, 신년 기자회견마저 취소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기대치가 높았기에 실망은 더 크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제왕적 대통령을 극복하겠다고 했으니 다시 한번 기대를 건다. 지금 약속한 권력분점 방안만 실천해도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말로 끝나지 않았으면, 제도가 잘못돼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 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솔직히 기대가 크지는 않다. 애완견 놀이터까지 약속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이라는 낡은 틀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다. 선거 캠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것을 보면 공공기관은 5년 후에도 전리품 취급을 당할 것 같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