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대를 입고 나를/ 사는 일인데/ 나는 그대를 입지 못하여/ 나를 살지 못하네// 사랑하는 이여,/ 나를 입어주소서/ 나를 입어 그대를/ 살아주소서/ 그리하여 내가 그대를 살게/ 하소서/ 그대를 살며 나를 살게 하소서/ 매순간 새로이 태어나/ 살게 하소서”(허향숙 ‘사랑은 그대를 입고’ 전문)
하교 후 면소재지에 위치한 전파상에 들러 전날에 아버지가 맡겨 놓은 라디오를 찾아오느라 귀갓길이 늦었다. 앞산을 삼켜온 어둠이 점령군처럼 빠르게 마을의 지붕을 덮어오고 있었다. 나는 배도 고파오거니와 어둠이 깊어지기 전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집은 강경 쪽으로 시오리쯤 떨어져 있었다. 한 손에는 책가방을, 다른 한 손으로는 라디오를 든 채 갔던 길을 되짚어 오다가 학교 앞을 막 통과할 때였다. 기척이 있어 돌아보니 한 여학생이 교문을 급하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남몰래 흠모해 왔던 소녀였다. 열여섯 살 내 가슴은 댐이 방류한 물살처럼 격하게 출렁거렸다.
그녀는 내가 그때까지 만나왔던 그 어떤 이들보다 인물이 출중한 데다 모던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만년 우등생에, 조각상처럼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에, 잔돌 위를 구르는 물방울처럼 목소리가 청아했다. 그녀와 나는 상호 간 이웃한 마을에 살고 있었으므로 사는 형편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여럿이 다니는 등하굣길에서 우연히 눈을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단둘이서 그것도 호젓한 밤길을 함께 걷기는 처음이었다. 어찌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숨이 가빠와 턱턱 막혀왔다. 파스를 붙인 것처럼 살갗이 화끈거렸고, 불에 달군 번철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온의 날씨에도 등허리엔 땀이 내를 이루고 앞가슴엔 물 묻은 손으로 전선을 만졌을 때처럼 전류가 찌르르 흐르고 있었다. 마음의 처마 끝으로 쉴 새 없이 떨어지던 기대와 설렘의 물방울소리! 생동하던 느낌을 나는 여태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해마다 두어 켤레 운동화를 해지게 하며 불량하게 굴긴 했으나 된장 만난 풋고추처럼 익숙했던, 풀밭을 흘러가는 뱀의 전신처럼 완만하게 휘어진 그 길이, 타지에서 만난 길처럼 낯설어 보였다. 종아리에서 목덜미까지 소름 꽃이 피었다 지곤 하면서 살얼음 걷듯 나의 행보는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도 곁눈질로 마음의 화살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과 나의 눈빛이 한순간 허공에서 얼크러졌다. 반짝! 섬광처럼 길을 밝히고 가뭇없이 사라지는, 수면에 미끄러지는 햇살처럼 하나이면서 둘인 눈빛. 그러나 빛의 길이는 애석하게도 너무 짧았다.
자신의 몸을 빠져나온 송아지를 핥는 어미 소의 혀처럼 부드러운 바람의 물결이 몸의 보리밭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의 상점에 하나둘씩 별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신작로엔 산에서 튀어나온 새 울음과 함께 두껍게 적막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지 속말을 털어놔야겠는데, 마음을 먹을수록 혀는 굳어져 갔고 가까스로 모아 놓은 생각은 수증기처럼 금세 휘발됐다. 근육이 긴장으로 빳빳해졌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 그녀도 무언가 고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눈길은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쏠리고, 그러길 몇 번이었던가. 그녀의 눈길도 천천히 냇물을 거슬러 오르는 치어 떼의 지느러미처럼 어둠의 물살을 가르며 내게로 건너오고 있었다. 아, 숨이 막혔다. 그렇게 십 리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우린 끝내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갈림길에서 헤어지고 말았다. 그날의 신작로를 떠나온 지 수십년이 됐다. 한가한 틈을 비집어 오는 그날의 풋풋한 감정에 젖을 때면 까닭 없이 부끄럽다. 몸속 홍안의 소년이 두근두근, 살고 있어서다.
이재무(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