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 광화문 거리를 지날 때였다. 지친 하루를 마친 직장인들은 영하로 떨어진 겨울바람에 코트 깃을 세우고는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바삐 스쳐 지나간다. 광화문 대로에서 맛집들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휴대폰 개통 대리점의 불빛이 환하게 보인다. 그런데 한 할아버지가 휴대폰 대리점의 커다란 쇼윈도 앞에 우두커니 서 계신다. 그러더니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랗고 때 묻은 배낭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는다. 이어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은 비닐봉지에서 구멍이 난 방석을 하나 꺼내더니 아예 가게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시더라.
그제서야 무심히 지나치던 행인들도 하나둘 슬쩍 할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쇼윈도에는 대형 TV가 놓여져 있다. 브라운관 속에서 초록색 추리닝을 입은 배우 오영수가 이정재에게 구슬을 내밀며 천진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옛날 무성영화처럼 대사 한마디 들리지 않고 입만 움직이는 화면을 할아버지는 그 내용을 다 아는 양 꼼짝도 않고 바라보신다.
그때 유리문이 열리더니 한 청년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깜짝 놀란 듯 엉거주춤 일어나 방석을 챙기려는데 청년은 할아버지의 더러운 가방을 들어 어깨에 메고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가게 쪽으로 손짓을 한다. 계속 손사래를 치던 할아버지는 청년과 함께 그 유리문 안으로 사라졌다. 추운 겨울밤, 광화문 어디엔가 몸 누일 곳을 찾다가 TV를 보시게 된 걸까. 화사하고 밝은 불빛이 쏟아지는 가게 안의 온기가 할아버지를 붙잡은 걸까. 노숙인들의 겨울을 생각이나 해본 적이 있었나. 나는 가게 앞 할아버지가 서 계시던 그 자리로 가서 투명한 창 너머로 마주 앉아 있는 청년과 할아버지를 봤다. 저 얇고 투명한 유리문이 마치 굳게 닫힌 철문인 양 얼마나 자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나. 그 문을 열고 나와 추운 길에 앉아 있는 행인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된 걸까.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저자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우리 인류가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은 비밀은 ‘다정한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른 똑똑한 인류는 사라지고, 호모 사피엔스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특정한 형태의 협력에 출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별과 상관없이 모두가 이웃 집단에 받아들여지고, 집단을 초월해 가족으로 결속하게 하는 포용력은 다른 영장류에게서 관찰된 바 없다고 한다. 우리는 수만년 전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다정했었다.
하지만 점차 인류의 다정함은 내 친구에게만, 내 가족에게만 향하는 감정이 됐다. 집 밖에 나오는 순간 다정함은 마치 나약함과도 같았다. 학창 시절 같은 반의 친구들은 시험 성적으로 등급을 나누는 경쟁자였고, 입사 이후에도 내가 승진하려면 다른 동기는 제자리에 있어야 했다.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고 약한 사람은 도태된다. 그게 자연의 이치라고 온 사회가 가르쳤고, 우리는 이를 ‘적자생존’이라고 불렀다. 그게 진화의 원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사실 적자생존은 원래 다윈이 고안한 표현이 아니다. ‘종의 기원’ 1859년 초판에는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적자’라는 단어도 없다. 이는 다윈의 전도사를 자처한 허버트 스펜서가 그의 논문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다윈은 오히려 자연에서 친절과 협력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번성해 가장 많은 수의 후손을 남겼다”라고 썼다. 진화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이상적 방법은 협력을 꽃피울 수 있게 친화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가장 잘 적응한 개체 하나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손잡은 다정한 개체들이 함께 살아남는 것임을. 저 유리문을 열고 나와 타인에게 손 내밀수록 우리는 이 지구에서 더욱 오래 함께할 수 있는 것임을. 그러니 새해에는 다정해져요, 우리.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