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올림픽을 보다 놓친 대선 후보 2차 TV토론회를 12부작 드라마처럼 끊어봤다. 보는 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2시간짜리 토론을 끝내는 데 1박2일이 걸렸다.
지난 몇 개월간 쏟아진 양당 후보 관련 의혹은 규모와 다양성 면에서 역대 대선을 압도했다. 수천억원대 개발이익의 행방 같은 블록버스터급 폭로가 있는가 하면 처가 관련 수사 무마부터 수십억원대 주가 조작, 고발 사주, 변호사비 대납 의혹도 나왔다. 그나마 이런 건 대선판에 등장할 법한 ‘수준 있는’ 폭로였다. 손바닥 왕(王)자에서 촉발된 무속인 비선 논란부터 배우자의 ‘법카 갑질’ 스캔들, 욕설·쩍벌·구둣발의 꼰대 애티튜드 시리즈까지 민망한 폭로도 줄을 이었다. 이걸 다 소화해 시비를 가리자니 유권자가 피곤해진 건 맞다. 그렇다고 나 같은 일반 유권자가 토론회에 심적 고통까지 느낄 일인가. 가진 건 고작 한 표인데.
2016년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리포트’에는 정치 신념을 도전받은 사람의 뇌 활동을 분석한 논문이 게재됐다. 특징은 두 가지였다. 흔히 ①멍 때리기 상태로 알려진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가 활성화되고 ②분노 등 감정을 취급하는 편도체와 뇌섬엽 일부에 불이 켜졌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면 뇌는 외부 자극을 차단하고 내면에 집중한다. 뇌가 불편한 정보의 유입을 틀어막고 자신이 옳다는 증거를 찾는 내적 검색에 몰두했다는 뜻이다. 감정중추는 불쾌한 감정을 일으켜 정치적 반론을 퇴치했다. 이때 감정중추는 마치 육체적 위협을 받은 것처럼 흥분했다.
정치인 얼굴이 유사 반응을 촉발한 증거도 있다. 2007년 ‘신경심리학’에는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당원에게 대선 후보 조지 W 부시와 존 케리 얼굴을 보여준 뒤 두뇌 활동을 분석한 논문이 실렸는데 공화당원은 반대당 케리, 민주당원은 부시를 볼 때 특정 뇌영역이 활성화됐다. 논문은 이를 반대 후보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일으켜 평가를 통제하는 뇌의 내적 규제 활동으로 추측했다.
정치적 신념은 공적·사적 경험이 계층·성별 같은 개인의 여러 정체성과 만나 형성된다. 정치 성향이 사회적 자아, 즉 내가 나인 이유와 깊이 연관돼 있다는 뜻이다. 투표란 이런 개인의 정치 신념을 특정 후보에 투사하는 행위다. 따라서 유권자는 후보가 공격받을 때 후보를 버리는 대신 방어한다. 일종의 자아 수호 투쟁인 거다.
토론회를 보며 내가 겪은 내적 격랑, 올해 유난했던 대선 피로증을 뇌과학에 대입해보면 많은 것들이 이해된다. 나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 두뇌 속에서는 기존 신념이 여러 장애물을 만나 다퉜던 모양이다. 새 정보와 오랜 믿음 사이에서 벌어진 신경학적 국지전이랄까. 때로는 지키고 때로는 무너지며 에너지를 소모하느라 지쳐버린 거다. 나만의 경험은 아닌 거 같다. 유력한 양당 후보에게 쏟아진 의혹은 유권자와 후보 간 전통적 유대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이 과정에서 약한 자들은 떨어져 나가고 중간 지대에는 신념의 이탈자들이 우글댄다. 덕분에 한 달도 안 남은 대선판은 아직 혼전이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누가 되든 이선망’이라는 글에서 “없는 갈등도 만들고 있는 갈등은 혐오로 바꿔내는” 정치가 대선 후에는 “더 무례”해질 거라고 걱정했다. 뭘 신뢰하고 뭘 비난해야 할지 헤매느라 나 역시 마음은 지치고 여러모로 낙담했다. 그래도 역대급 비호감 대선에서 장점 하나는 찾았다. 폭로가 공론장을 떠도는 동안 신념의 전투에서 패배한 많은 이들은 누더기가 된 자아를 보며 새 정체성과 그걸 이끌 새 정치를 고민하게 될 거다. 적어도 나의 정체성은 말랑말랑해진 거 같다. 이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인데 우리 정치 덕에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