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유럽연합(EU)이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인수·합병(M&A)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3년 전 접수한 이후 코로나19 등을 핑계로 계속 심사를 미루다 본격 검토한 지 한 달 만에 결론을 냈다. EU는 세계 1, 3위 조선사가 합칠 경우 선가를 올려 머스크, MSC 등 유럽 해운사가 피해 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현대중공업이 제시한 선가 동결이나 기술이전 방안은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 EU가 불허함에 따라 소극적 태도를 견지해 온 일본과 한국 정부의 심사 절차도 종료됐고 M&A는 최종 무산됐다.
조선·반도체 등에서 굵직한 글로벌 M&A 계획이 발표되고 있지만 특정 국가의 반대로 승인이 지연되는 일이 잦다. 각국의 글로벌 M&A 심사는 자국 공정거래법에 법적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 공정거래법에 의하면 자산 총액이나 매출 규모가 3000억원 이상인 기업이 포함된 글로벌 M&A나 국내 매출이 300억원을 넘는 외국 기업을 인수하는 경우 한국 정부의 M&A 심사를 받아야 한다. 국가별 심사 기준과 절차는 다르지만 대부분 6개월 안에 처리해야 하는데 이를 지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글로벌 M&A는 반독점이나 경쟁에 미치는 영향 중심으로 심사해야 한다. 작년 말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사상 최대 M&A로 꼽히는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설계기업 ARM 인수를 칩 디자인에 대한 지배권 우려로 반대소송을 제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때로는 이 제도가 국가 안보와 전략적 이익에 반하는 투자를 차단하는 방안의 하나로도 활용되고 있다. 잠재적 영향을 줄 수 있는 투자까지 포괄적으로 조사하고, 설사 자국 경제와 직접 관련 없는 M&A라도 자국 기업과의 거래를 막는 식으로 견제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특정 딜이 산업정책적으로 자국에 유리한지에 따라 승인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대표적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수많은 글로벌 M&A가 자국 산업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몽니를 부려왔다. 심사 주무부서인 중국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SAMR)은 뚜렷한 이유 없이 지연시키기로 악명이 높다. 2018년 미국 퀄컴과 네덜란드 NXP의 M&A를 불허해 전체 딜을 무산시켰다. 작년엔 미국 어플라이드머트리얼즈와 일본 고쿠사이일렉트릭의 M&A 승인을 9개월 넘게 끌다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독과점 방지와 공정 시장질서에 앞장서야 할 반독점 기구가 자국 우선주의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이닉스와 인텔 낸드 사업부 M&A도 신청한 지 1년을 끌다 작년 말 승인했다. 양사의 시장점유율을 합해도 20%에 못 미쳐 통과가 무난할 것으로 보았지만 2차례 심사 연장 결과 조건부 승인을 했다. 직전 2년 가격 인상 금지, 5년간 현지 생산 확대 및 해외시장과 차별 없는 공급 등 6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이번 조건부 승인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의 미측 진영 가담을 견제하고 자국 산업에 유리한 조건을 얻으려는 것이다. 승인 지연과 불합리한 조건 등은 우리 반도체산업에 대한 견제로 볼 수밖에 없다. 회사 입장에서 계획 변경이 불가피하고 금융 조달에 차질을 빚는 등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못내 아쉬운 것은 우리 정부의 태도다. 우리 기업의 M&A 승인이 지연될 경우 외교 당국이나 산업 부서 등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지원사격을 해줘야 한다. 그러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정작 기업을 도와야 할 정부가 눈치만 보다 결론을 내지 못해 무산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기업은 생존 차원에서 어렵게 딜을 성사시키고 M&A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지원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수수방관 속에 기업은 속이 타고 있다.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