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연 자리에서 지역균형발전을 놓고 한참 토론했다. 수도권 이외 지역이 나름대로 자족할 수 있게 만들어 냈던 정책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포한 박정희 정권은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 등 6대 전략 업종을 설정하고 그때부터 포항, 울산, 창원, 거제, 구미, 광양, 여수 지역에 공장을 지었다. 대일청구권, 베트남 특수로 인한 자본으로도 투자를 채우기 부족하자 내수자본 동원을 위해 정부가 국민투자기금을 조성한 뒤 국민의 저축성예금이 증가하는 만큼을 중화학공업 투자에 활용하기도 했다.
가발 수출하던 경공업의 나라는 80년대를 거쳐 중공업의 나라가 됐고 90년대 이후 수출주도경제를 확립했다. 덕택에 부산·울산·경남 동남권으로 대표되는 남동임해공업지역의 ‘노동계급 중산층’이 형성됐다. 70, 80년대 직업훈련소와 공업고등학교를 거친 노동자들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임금을 인상하고 기업 복지 체제를 형성했다. 수출 대기업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파고가 상대적으로 덜했기에 90년대와 2000년대를 그대로 돌파하면서 “개가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의 원조를 따지기도 했다.
달리 보면 중화학공업화와 동남권의 예는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 그럭저럭 인구 유출을 걱정하지 않고 살기 위해 온 국가의 역량이 수십년 동안 집중 투입돼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같은 시점 경부(서울-부산)축을 제외한 호남과 강원 지역이 발전국가 대한민국에서 최소한 30년가량 소외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역균형발전의 균형을 고려하면서 또한 유효한 축을 만드는 이중 과제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 수 있다.
새로운 전략이 없는 가운데 2017년에는 지역 내 총생산에서, 2019년에는 인구에서 수도권이 비수도권을 추월했다. 문재인정부는 참여정부 유지를 받아 지역균형발전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고, 2020년 발표된 160조원 투자 계획인 한국판 뉴딜 정책에서 전체 예산 중 47%가 지방에 투입된다. 더불어 지자체가 주도하는 사업과 혁신도시에 위치한 공공기관이 선도하는 뉴딜이 지역균형 뉴딜을 강화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 사업들이 기존 공모사업에 지역 인센티브를 줬을 뿐이고, 구도를 흔들기에는 부족하다.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일종의 새로운 전략은 메가시티라 볼 수 있다. 도시화율이 극대화되고 경쟁력 있는 도시로 모두 몰려가는 ‘도시의 승리’ 상황에서 수도권 집중이 심화되기에 개별 광역지자체가 경쟁하는 게 아니라 초광역으로 묶어 수도권에 대항하자는 것이다. 부산·울산·경남을 함께 엮어 초광역을 만들자는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이 2019년 발표됐고 이제 대구·경북, 광주·전남, 대전·세종·충북·충남까지 포함해 4대 권역별 메가시티가 진행 중이다. 그런데 각 지자체의 메가시티 추진은 지역균형발전을 추동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점진주의냐 급진주의냐는 정책학의 질문이 떠오른다. 지역균형발전은 지역균형 뉴딜의 사례처럼 국가 관료와 부처 담당 공무원의 과업일까 아니면 정치의 선택 문제인 걸까. 양대 정당의 두 대선 후보는 지역을 찾을 때마다 메가시티로 살리겠다고 호소한다. 그런데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한 권역이 자족하게 된 것은 수십년간 국가와 자본의 집중 투자가 있어서였고 그건 정치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226개 기초지자체와 17개 광역지자체에 고르게 투자하거나 각 지자체가 경쟁해 공모사업을 따내는 구도가 수도권 집중을 막는 데 효력이 없는 게 밝혀진 지금,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남는 건 국가적 차원의 정치적 의사 결정이다. 임시변통으로 눈치를 봐가며 예산을 여기저기 쪼개주며 점진주의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총의를 모아 자원과 역량을 집중하는 급진주의적인 정치적 선택에 가깝다.
이제는 독재정권이 아니니 중앙정부가 맘대로 결정하면 안 된다는 시선이 있을 것이다. 시장에 맡겨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마냥 수도권 집중이라는 경로의존을 더 심화시키다가 어느 순간 그 한계에서 빅뱅처럼 새로운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단계까지 발생할 사회적 비용과 국토 활용의 비효율은 누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정치적 쟁점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역균형발전 공약이 지금처럼 대선 주자의 지역 유세에 적당히 동원되는 임기응변 메시지가 아니라 분명한 목표가 있는 전략 그리고 그에 대한 격론으로 전개되길 바란다.
양승훈(경남대 교수·사회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