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채화는 취미 삼아 그리는 아마추어 장르처럼 인식된다. 종이에 칠하면 금세 색이 배어들고 덧칠해서 수정하기도 어려워 수채화야말로 고도의 테크닉이 요구된다.
‘대구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1912∼1950)이 아내를 그린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1934)도 수채화다. 얼핏 유화로 느껴질 만큼 색이 풍부하고 세련됐지만, 칼국수를 먹은 뒤처럼 개운한 맛이 풍긴다. 그게 어디서 연유하는 걸까 싶어 가까이 가서 보면 기름을 쓴 유화가 아니라 물을 쓴 수채화 작품이라 그렇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수채화의 역사는 언제 시작됐을까. 지역으로는 대구, 화가로는 서동진(1900∼1970·사진)을 이야기해야 한다. 서동진은 가난했던 이인성이 화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부축해 준 스승이다.
일제강점기 서구 문명이 밀려들었을 때 중심지는 서울이었다. 미술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귀국하면서 우리나라 1호 서양화가가 된 고희동의 활동무대가 서울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방에선 평양과 대구였다. 2호 서양화가 김관호가 평양 출신이다. 도쿄미술학교 졸업반이던 1916년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하며 화제 몰이를 했던 김관호는 귀국해 그해 12월 첫 개인전을 평양에서 가졌다. 여기서 서양화는 곧 유화였다.
대구는 특이하게 수채화 문화가 강했다. 그 중심에 서동진이 있다. 그는 27세이던 1927년 대구 효목동 조양회관(독립운동가 서상일이 세운 교육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제목부터 ‘서동진 수채화 전시회’다. 그렇게 그는 한국 첫 수채화가가 됐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기자로 일하던 1981년 미술잡지 계간미술 가을호에 쓴 ‘수채화의 정착과 대구 화단의 형성’에 따르면 전시회에는 ‘농가 오후’ ‘실내’ 등 풍경 위주 작품 45점이 나왔다. 계간 미술에는 대구의 교외에서 이젤을 앞에 두고 벙거지를 쓴 채 그림 그리는 1920년대의 서동진 사진도 실렸다. 낯선 미술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당시 매일 1000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전시회를 찾아오는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서동진은 신기해하는 관객들을 위해 전시회 중간에 수채화 시연을 하고 재료의 특성도 소개했다고 근대미술 연구자 김영동씨는 전한다. 서동진으로 인해 1920∼30년대 대구 화단은 다른 지역과 달리 수채화 장르가 성행했다.
서동진이 서양화를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대구의 부유하고 진취적인 집안 출신인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미션스쿨인 계성학교에 진학했다. 여기서 도화(미술)를 가르치던 이상정을 만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이상정은 일본 도쿄 국학원대학(國學院大學)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귀국할 때 서양화 화구를 가져왔다. 한때 계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 이상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의 형이다.
1919년 3·1운동 때 계성학교 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 계기가 돼 학생들이 무더기로 제적당했다. 서동진도 그때 중퇴했다. 이후 서울 휘문고보에 입학했는데 여기서 미술교사로 출강하던 고희동을 만났다. 서동진이 1924년 졸업과 함께 모교인 대구 계성학교에서 미술교사가 된 것은 이상정 고희동의 영향일 것이다.
서동진은 1년 정도 교사 생활을 하다가 25~26년 일본으로 미술 연수를 간다. 미진한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대학에 적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귀국과 함께 27년과 28년 연속 개인전을 연다. 28년부터 지속적으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해 32년까지 4차례 입선한다. 28년에는 대구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성화가가 찬조하는 단체인 영과회가 발족한다. 30년에는 기성미술인이 주축이 된 향토회가 창립한다. 대구화단의 활발한 활동의 중심에는 늘 서동진이 있었다.
서동진을 얘기하자면 그가 27년 세운 ‘대구미술사’라는 특이한 상호를 기억해야 한다. 이곳은 미술 관련 인쇄업을 하면서 미술 연구를 하던 곳이고 지역 문화계 인사들의 사랑방 노릇을 했다. 후학을 키워낸 요람이기도 했다. 서동진과 대구미술사가 없었다면 천재화가 이인성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은 운명적으로 조우했다. 하루는 서동진 일행이 교회가 있는 곳으로 그림을 그리러 갔는데, 그곳에 그림 그리는 소년이 있었다. 솜씨가 놀라웠다. 수창보통학교 5학년에 다니던 이인성이었다.
이인성은 보통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런 사정을 알고 대구미술사에 취직시켜서 그곳에서 먹고 자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 이가 서동진이다.
그렇게 한 지 2년 만인 29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제8회 선전에 서동진과 이인성이 출품한 작품이 나란히 수채화로 입선한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동시 입선, 언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서동진은 당시 신문에 “저보다도 이인성군이 입선한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다. 이군은 제가 2년 전부터 가르쳐 금년 처음으로 출품한 것으로 18세 소년이다. 장래 두 사람이 연구하여 일인자가 될 결심”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런 소망과 달리 둘의 인생 행보는 달라진다. 이인성은 이후 선전에서 내리 수상했고 재주가 소문나며 지역 유지이자 경북여고 교장을 지낸 일본인의 주선으로 31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문부성전람회와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입선하며 스타 화가가 됐다.
서동진도 30년대 중반까지 10년 정도는 작가로 살았다. 만주사변 등으로 정국이 어수선해지면서 향토회가 35년 전시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중단했고 서동진도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동진은 33년 행시와 사시에 동시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해방 이후부터는 경북청년회 철공협회 등의 회장을 맡는 등 사회활동에 더 열심이었다. 나중엔 정계에 진출해 국회의원이 됐다. 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뒤에는 수채화가 아닌 전통 서화를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 따라서 서동진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거장으로 기록되진 않는다.
대구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에는 서동진이 그린 수채화 ‘자화상’(1924) 1점이 포함됐다. 계성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에 그린 초기작이다. 우리나라 수채화 태동기를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그림이다. 의복 표현이 미숙하지만 얼굴과 머리칼은 꼼꼼한 붓질로 양감을 풍부하게 살렸다. 붓질에서 미술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서동진 자화상은 대구를 모태로 하는 삼성가에서 지역 최초의 서양화가 서동진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은 수구초심의 컬렉션이 아닐까. 삼성은 38년 대구에 세운 삼성상회가 출발이며 이건희 회장은 대구 태생이다. 서동진 자화상은 삼성가의 대구 사랑 징표 같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