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한국교회가 변화주도 공동체로 거듭나자…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심비우스로

입력 2022-02-15 20:19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참으로 위험한 세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이 세상의 변화를 주도해 왔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 세상의 변질에도 한 몫을 감당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 교회가 변질이 아닌 변화를 주도하는 공동체로 다시 서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과연 복음이란 무엇인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근주 박사가 쓴 책이 있다. <복음의 공공성>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보통 복음이라고 하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 [나를 위해] 라는 말은 단골 멘트였다. 이 말 <나를 위해, 나의 죄를 청산하시기 위해, 나를 천국 보내시기 위해, 내게 영생 주시기 위해> 이 말은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틀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100% 맞는 말은 아니다. 복음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이웃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시다. 우리를 위한 복음이다.

Jim Wallis(짐 월리스)는 그의 저서 <하나님 편에 서라>는 책을 통하여 “복음은 결코 사적이지 않다. 예수님은 개인의 속죄만 이루신 분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가 먼저 쓴 책이 있다. <부러진 십자가>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독교를 공적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도 보시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그런데 한국 교회가 복음의 공적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초대교회 시절, 이스라엘 땅의 신흥 종교이자 유대인들에게는 이단으로 취급받던 초기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가며, 수많은 사람들의 복음이 된 것은 당시에 천하고 우둔하고 연약하다는 노예, 여성, 어린이를 품었기 때문이다. 복음은 나만의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너와 나의 복음, 우리의 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공공의 복음이다. 우리 하나님은 나만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너도 살기를 원하신다. 아니 우리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교회가 변해야 한다

서울신학대학 최형근 교수는 “한국교회 안에 공적 복음이 살아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최 교수는 우상숭배의 범위를 성공 지향적 사고, 권력 집착 행동, 육신의 정욕으로 요약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중심적 성향>이라고 꼬집고 있다. 최 교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기독교 복음의 공적 차원을 사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려 자기 만족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인간적 종교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계몽주의와 모더니즘으로 인하여 인간의 자유성, 독립성의 추구가 자아를 극대화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로 들어오면서 복음을 사유화했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 내 주장대로 되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우상숭배이다.

독자 여러분들은 중국몽이란 단어를 알고있습니까?

중국몽(中國夢, ZhungguoMeng 중궈멍, Chinese Dream) 은 시진핑 주석이 2012년 11월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추대되면서부터 처음으로 사용했다. ‘중국몽’은 미합중국과의 수평적 관계 형성, 중국식 강대국 외교를 통한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제 위치 찾기, 경제 패권국으로의 발전을 위한 패권국가로서 역할과 정체성 확립 등이 핵심이다. 소위 팍스 시니카(Pax Sinica)이다. ‘중국에 의한 평화’는 라틴어의 뜻으로 중국의 패권에 의해 동아시아에 평화가 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이 중국몽을 외치고 나오니 미국은 ‘America first and only America first’를 외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은 “make America first again”을 외쳤다. 시진핑이나 트럼프나 잘못된 역사관을 가진 지도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만 이런 사고가 박힌 것이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사고 속에 이 병든 바이러스가 침투해 있다. <오직 나, 내 아이, 내 가족, 내 교회, 내 나라> 이것은 병이다. 큰 병이다. 무서운 바이러스이다. 이것은 우상숭배이다.

시편 133편 1-3절은 말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공동 번역을 보면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NASB 성경에는 “how good and how pleasant,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너무 좋아. 너무 즐거워. 뭐가? 사람들이 연합하여 동거함이!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중국만, 미국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화여대의 최재천 석좌교수는 “과거에는 사람을 정의하기를 이라고 정의했다. 지금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라고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표현이 있다. Homo Empathicus(호모 엠파티쿠스, 공감형의 인간empathy)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적 복음만 외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의 공공성을 외치는 교회로 변해야 한다. 어떤 인류학자가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그 학자는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과일 바구니를 멀리 나무 밑에 놓았다. 그리고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빨리 달려 1등 하는 자에게 이 과일을 다 먹을 기회를 줄 것이다” “달려”.

아프리카 아이들은 “달려”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옆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외쳤다. 이 말은 남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이다. “I am because you are”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 “다른 사람이 슬픈데 어떻게 나 한 사람만 행복해질 수 있나?” 인류학자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고개를 숙이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한다

생태계에서 생명이 군집을 이루는 방식이 크게 세 가지라고 한다.

첫째, 경쟁(competition)이다. 비슷비슷한 개체들끼리 먹이를 두고 다투고 싸우면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둘째, 포식(predation)이다. 먹고 먹히는 관계이다. 힘이 센 놈이 약한 놈 잡아먹고, 약한 놈은 잡아먹히는 걸 자연의 이치나 운명으로 여기며 사는 군집 내 상호작용의 방식이다.

셋째, 공생(symbiosis)이다. 라틴어 symbious(심비우스)이다.

숭실대 구미정교수가 쓴 <호모 심비우스>라는 책을 보면 “소위 머리 좋다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분리와 단절, 지배와 복종의 세계관을 유포시켜 마침내 천지 만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면, 이제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세계관은 연결과 소통, 공존과 연대의 그것이 아니겠냐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싶었다. 그런 세계를 꿈꾸며 열어갈 사람은 필경 더불어 삶의 지혜를 아는 신인류, 곧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여야 하리라.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빨리 성공하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 않고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은 인간 군상들이 그야말로 홀연히 하늘의 은총을 입어 더불어 살 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날 때 이 지구는 얼마나 다른 세상이 될 것인가? 소유를 넘어 나눔으로, 지배를 넘어 섬김으로, 그렇게 세상의 흐름에 맞서 사는 새 사람, 호모 심비우스야 말로 성서 기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에 담고자 했던 본뜻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든 사람 속에 진정으로 담겨져 있어야 할 것은 호모 심비우스이다. 악어와 물새도 공생하지 않는가? 아프리카의 아카시아와 개미도 공생하지 않는가?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 공생하지 못한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포스트 팬데믹(post pandemic)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최재천 교수는 “박쥐, 사향고양이, 낙타 등이 우리에게 해를 끼친 것이 아니라, 그 동물들에게 먼저 다가가 동물들 생활을 방해한 인간들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인간들이 잘살고 있는 박쥐 서식지를 침범하고, 악어 고기, 얼룩말 고기 심지어 유인원 고기까지 파는 식당이 버젓이 런던 파리 같은 대도시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병원균 숙주는 인류에게 뛰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논어 자로(子路) 편에 보면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화’(和)하는 사람이란다. 서로 다른 음이 겹쳐져 화음(和音)이 되고 조화(調和)를 이뤄내는 것처럼, 군자는 같지 않다고 해서 잘라내고 쳐 내는 사람이 아니라, 다르지만 조화를 이뤄낼 줄 아는 사람이다. 반면에 소인은 ‘화’하지 못하는 사람이란다. 결국에는 다 같은 것인데도 자꾸만 다르다고 하고, 이편저편을 가르면서 불화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소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복음은 우리의 복음이다. 우리 한국 교회는 ‘나’ 라는 우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공생해야 한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남녀가 어찌 적이란 말인가? 노소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부자와 가난한 자,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공생해야 한다. 모든 피조 세계와 자연 만물이 공생해야 한다.

이정원 목사(주하늘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