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이 다른 실력으로 피겨여왕 등극을 눈앞에 뒀던 러시아 스타 카밀라 발리예바가 약물 논란에 휘말렸다. 국가 주도 도핑 스캔들에 연루돼 국호 대신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로 출전 중인 러시아는 ‘또 약물이냐’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마크 애덤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대변인은 10일 정례 브리핑에서 “(발리예바) 사건은 현재 법적 논의가 진행 중인 사안이라 언급하지 않겠다. 인내심을 갖고 결론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을 아꼈다. 당초 IOC는 이날 오후 해당 사안과 관련해 공식 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전해졌지만 별도의 입장 표명은 없었다.
약물 이슈로 발리예바의 실격이 확정된다면 러시아가 피겨스케이팅 단체전에서 딴 금메달은 무효가 된다. 이 경우 미국이 금메달, 일본이 은메달로 올라서며 4위 캐나다가 동메달을 받는다. 발리예바의 개인전 출전자격도 박탈된다. 발리예바는 이미 단체전에서 쇼트프로그램 90.18점, 프리스케이팅 178.92점으로 경쟁 선수들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선보였다. 동계올림픽의 ‘꽃’ 피겨 여자 싱글에서 사실상 대관식만 남겨뒀다는 평가를 받던 우승후보 1순위였기에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발리예바가 도핑에 연루됐다는 의혹은 8일 피겨스케이팅 단체전 공식 시상식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불거졌다. ‘알려지지 않은 법적 문제’라는 IOC의 설명에 추측이 난무하던 중 영국 매체 인사이드더게임즈는 9일 “발리예바가 올림픽 개막 전 실시한 도핑 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이 나와 시상식이 연기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언론의 후속보도도 이어졌다. 러시아올림픽위원회는 발리예바가 금지 약물 양성 반응을 보였다는 보도에 대해 논평을 거부했다.
RBC, 코메르산트 등 러시아 매체들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발리예바의 도핑 샘플에서 협심증 치료제인 트리메타지딘이 소량 검출됐다는 얘기가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트리메타지딘이 신체적 능력 향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발리예바가 도핑방지 규정이 적용되는 16세 이상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공식 규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일제히 쏟아냈다.
현재 IOC와 국제빙상연맹(ISU)이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는 이유도 면책 판정과 관련한 법률 해석 때문으로 추정된다. 나이와 고의성 여부 등을 고려해 실격보다 낮은 페널티가 주어진다면 출전 자격을 유지하고 경고만 받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러시아에 단체전 금메달이 수여되고 발리예바의 개인전 출전도 가능해진다.
트리메타지딘은 협심증 치료 외에 흥분제로도 이용될 수 있어 2014년 금지약물 목록에 올랐다. 중국 수영영웅 쑨양이 2014년 도핑테스트에서 해당 약물 양성반응을 보여 중국반도핑기구로부터 3개월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러시아 여자 봅슬레이 나데즈다 세르게예바도 도핑 결과 트리메타지딘이 검출돼 실격 처리와 함께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러시아는 2014년 당시 러시아반도핑기구에서 근무한 비탈리 스테파노프와 육상선수 율리아 스테파노바 부부가 금지약물 투여 및 조작에 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내부고발을 하면서 약물 논란의 중심에 섰다. 국가 주도 도핑스캔들 여파로 2020년 12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로부터 2년간 올림픽과 월드컵 등 주요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하는 제재를 받았다. 러시아 선수단은 국가를 대상으로 한 징계를 우회해 이번 올림픽도 ROC로 출전 중인데 이번 도핑이 공인될 경우 징계가 연장될 가능성도 있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