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약속의 남발, 길 잃은 후보들

입력 2022-02-11 04:08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대표 공약은 기본소득이었다. 찬성보다는 반대가 많은 주제였지만, 기존 이슈를 모두 제압하는 파괴력을 보였다. 선거에서는 프레임을 장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실현 가능성 유무를 떠나 기본소득 논쟁은 이 후보에게 유리한 구도였다. 이 후보는 유능한 실천가라는 이미지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기본소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당 안팎의 계속된 비판에 언론과 전문가들도 기본소득에 부정적이었다. 부동산 문제가 터지고 대장동 비리라는 초대형 악재까지 겹쳤다. 이 후보는 기본소득 전선에서 이탈했다. 대신 실용주의라는 명분 아래 ‘많은 약속’을 선택했다.

이 후보가 최근 한두 달 사이에 내놓은 공약들을 보면 어지러울 정도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말하다가 35조원 추경을 말하고 최근엔 긴급재정명령권 행사도 약속했다. 대선 후보로는 처음으로 전국 226개 시·군·구별 공약을 제시했고,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공약도 쉬지 않고 발표한다. 10일 기준 소확행 공약은 68개가 발표됐다. 고속도로 졸음쉼터 태양광 그늘막 설치가 58번, 어르신들 위해 전국 지자체에 파크골프장 1개 이상 건립이 68번이다. 이 정도면 공약 남발이다. 너무 많은 약속을 하니 어느 게 이 후보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총선에서 본 듯한, 지난 대선에서 본 듯한 약속들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공정, 상식, 통합을 내걸며 정치를 시작했다. 외압에 굴하지 않는 강골 검사는 윤 후보의 상징자본이었다. 그리고 “아흔아홉 가지가 달라도 정권교체라는 한 가지만 같으면 모두 힘을 합치자”고 했다. 윤석열 표 빅텐트론이었다. 이 전략은 국민의힘 내분을 거치면서 갑자기 사라졌다. 지금 윤 후보의 말과 행동에서 공정과 상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부인 김건희씨 문제에서 머뭇거렸고, 측근 전횡 논란에도 입을 닫았다. 빅텐트론도 쪼그라들었다. 김종인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나갔고,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도 새시대준비위원회 위원장에서 사퇴했다. 윤 후보가 돌파구로 선택한 것은 보수 색채 강화였다. 여성가족부 폐지, 사병 월급 200만원, 사드 추가 배치, 적폐 수사와 같은 20대 남성과 보수 입맛에 맞는 약속을 내놓았다. 모두 다 논쟁적인 주제들인데, 윤 후보는 거침이 없었다. 과감한 정도를 넘어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다. 공정과 상식은 사라지고 ‘우익 전사’만 남았다. 외압에는 굴복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표에는 항복한 것이다.

후보들이 표를 좇아 이리저리 뛰어다닌 결과는 지금의 안갯속 구도다. 대선을 한 달 앞둔 시점에 실시된 여론조사를 보면 두 후보 모두 기존 지지층만 확보한 상태다. 윤 후보 37.2%, 이 후보 35.1%, 안 후보 8.4%(국민일보, 3~4일 조사)였다. 다른 여론조사 결과도 비슷했다. 운동장에서 공만 보고 달리면 동네축구가 된다. 뛰어다닌 활동량에 비해 성과가 적은 편이다. 지금 후보들의 상황이 그렇다. 두 후보는 전국을 누비며 많은 약속을 했지만, 지지율 측면에서는 몇 달 전과 비교해 별로 나아진 게 없다. 한국갤럽 기준 지난해 10월 지지도는 이재명 34% 윤석열 31%였고, 1월 지지도는 이재명 35% 윤석열 35%였다. 두 후보 모두 제자리걸음을 했다. 양당 기득권 구도 청산으로 기대를 모았던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단일화 늪에 빠졌다.

대선이 26일 남았다. 다음 주면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후보들은 더 많은 약속을 내놓을 채비를 갖추고 있다. 지지율 상승, 중도층 견인을 노리는 후보들은 더 파격적인 약속을 준비하고 있을 게다. 퍼주기 공약이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으니, 이제 정치개혁 약속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할 차례다. 때마침 단일화 이슈가 생기니 갑자기 공동정부, 연립정부, 통합정부론이 무성해졌다. 임기 단축, 대통령 권한 축소를 위한 개헌 얘기도 등판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전개는 너무 식상하다. 더 많은 약속, 더 강한 약속으로는 유권자를 설득할 수 없다. 실패의 경험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선거일로부터 한 달 이내에 후보를 결정하는 유권자가 30% 정도라고 한다. 후보들에겐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 약속을 남발하기보다는 약속에 진정성을 입혀야 할 때다. 언제나 유권자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은 약속이 아닌 진정성이었다.

남도영 논설위원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