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 백종천·조명균 8년 만에 유죄

입력 2022-02-10 04:04
백종천(왼쪽)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비서관이 9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에 참석한 후 나오고 있다. 서울고법은 이날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무단 폐기해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들에게 각각 징역 1년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연합뉴스

서울고법 형사8부(재판장 배형원)는 9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무단 폐기한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의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을 열고 이들에게 각각 징역 1년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회의록이 담긴 문서관리카드를 확인하고 서명을 생성했기 때문에 이 문서관리카드를 대통령기록물로 봐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피고인들이 ‘e지원시스템’에서 이 문서관리카드가 인식되지 못하도록 정보를 삭제한 일은 공용전자기록손상죄로 판단됐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을 향해 “당연히 후세에 전달해야 할 역사 기록물을 무단 폐기한 죄책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이 상의해 대통령기록물을 삭제했다”는 내용의 공소사실이 법원에서 최종 인정받기까지는 3009일이 걸렸다. 기소 뒤 8년 2개월여간 법원의 판단이 무죄에서 유죄로 뒤집혔지만, 달라진 건 회의록 폐기라는 사실관계가 아니라 법리 판단이었다.

법리적 선례가 없던 사건에서 오랜 기간 쟁점이 된 것은 수정 지시가 내려간 문서가 대통령기록물이냐는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전자서명이 있지만 수정 보완 지시도 부기(付記)됐다는 점에서 조 전 비서관 등이 삭제한 것은 회의록 ‘초본’이나 ‘초안’이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 수사팀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원본’과 ‘경정본’으로 칭해 왔다. 애초부터 대통령의 결재를 위해 올려진 문서였고 “1급 비밀 지정기록물로 하겠다”는 내부 보고가 있었던 만큼, 함부로 다룰 초안이 아니라 원본이라는 논리였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삭제 의혹은 정문헌 전 새누리당 의원이 2012년 “노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했다. 여야가 대통령기록관에서 회의록을 발견하지 못했고 고발이 이어졌다. 인지사건도 아닌 고발과 배당이었지만 수사팀은 “수사 자체가 정치”라는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한편으론 진상을 규명할 범위도 방대했다. 수사팀이 일일이 살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의 기록물은 약 750만건이라고 한다. 제목과 내용이 다를 수 있다는 판단에 모든 문서를 열어 확인해야 했다. 많은 기록에는 암호가 걸려 있었다.

대통령기록물은 검찰청으로 들고 나와 선별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열람해야 했다. 오전 10시부터 압수수색에 들어가 야간에 장소를 ‘봉인’하는 방식으로 91일간의 압수수색이 이어졌다. 검찰 관계자들은 기간으로는 최장일 것이라고 말한다. 수사팀은 사무실과 가구를 대여해 두고 일했다. 이때 수사팀이 발견한 “대통령님, 백종천 실장과 상의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폐기했습니다”라는 보고문이 핵심 증거가 됐다.

수사팀은 방대한 기록물을 확인했지만 별건을 수사하지 않았다. 기소 이후 8년여간 여럿이 검찰을 떠났는데 옛 팀원들이 만나서도 서로 수사 내용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수사 당시에도 극도로 보안을 유지한 탓에 관계자를 여러 차례 소환했음에도 정치권이 “조사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 적도 있다. 공소장에 밋밋하게 사실관계만 열거되자 법원이 “범행 동기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수사팀은 “동기 설명엔 추측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거부하다 간략한 내용을 추가해 공소장을 변경했는데, 이 부분은 판결문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경원 박성영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