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바보란 소릴 들어도 좋소

입력 2022-02-12 03:10

융통성은 형편이나 상황에 맞게 일을 잘 처리하는 재주나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상황 가운데 더 주목받는 역량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오늘은 융통성과 합리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세상 속에서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모습으로 사는 것을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오늘날 사회 조직에서 인정받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보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융통성 있게 시간과 재정, 에너지를 활용해 효율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내는가입니다. 반대로 고지식한 사람은 저평가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합리성과 효율성이 교회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됐습니다.

먼저 시간 계획에 대한 합리성을 교회에 접목하려는 시도로 인해 예배의 형식도 모든 걸 간소화하게 됩니다. 짧고 간결한 예배를 회중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은 또 어떻습니까. 정결하게 몸과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 처소로 향할 준비를 하던 과정이 많은 부분 생략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장기화로 인해 온라인 예배가 일상화되면서 더욱 편의성을 추구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라떼는 말이야”라고 치부할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신 신앙 선배들께서 준비하셨던 예배의 몸가짐, 마음가짐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한 신앙의 선배들은 예배 전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준비하셨습니다. 단순히 외형적인 부분에 대한 점검이 아닙니다. 몸이 흐트러지면, 마음도 자연스레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중심이 어떻게 바로 세워져 있는지 중요한 가치를 두고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경제적 소비에 대한 부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물에 대한 의미가 점차 흐릿해지는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물이 융통성과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덮여버리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활경제의 중요성이 최우선순위로 여겨지는 자본만능주의가 세상을 덮어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하시는 분, 돈을 필요로 하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렸던 여인의 ‘두렙돈’이 돼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재정 역시 주님의 뜻에 가장 합당한 쓰임보다 합리성, 융통성에 더 중점을 두고 쓰여진다면 이는 결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나드 한근(12온즈, 350ml)의 가치는 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삼백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 값비싼 향수를 깨뜨린 것에 대해 가룟 유다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융통성 없는 행동이라며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죽음과 생명 앞에서 물질의 가치에 우선을 두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머리털로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노예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주관자 되신 예수님 앞에 철저히 굴복하는 겸손을 보입니다.(요 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요 12:7) 결국 깨닫지 못하는 때에도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한 마리아의 헌신에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하십니다.

세상의 합리성과 융통성이 중요한 가치가 된 이 시대에 주님이 원하시는 천국의 방식은 가장 비합리적인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는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 칭찬받는 신앙인으로의 삶인지 명확하게 알고 실천해나가야 합니다. 혹 세상의 누군가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세상적 가치로 볼 때는 가장 융통성 없고, 비합리적 삶을 가치로 삼고 살아가신 분. 바로 그런 모습의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기 원합니다.

박요한 서울 프렌즈교회 목사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에 자리 잡은 프렌즈교회는 맡겨주신 영혼의 친구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전하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