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연극 교류 20년 “협력·보완하는 파트너로 성장”

입력 2022-02-09 04:06
한일연극교류협의회 회장인 연출가 심재찬(왼쪽)과 전문위원인 번역가 이시카와 쥬리가 지난 4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제10회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12월 해외문화홍보원 50주년을 맞아 해외에서 한국문화 홍보에 애쓴 개인 3명과 단체 1곳에 장관 표창을 수여했다. 이때 유일하게 수상한 단체가 한국 연극의 일본 진출과 한·일 연극인 교류에 기여한 일한연극교류센터다.

2000년 일본에서 설립된 일한연극교류센터는 2002년부터 일본 문화청의 지원을 받아 한국 현대희곡을 일본어로 번역해 낭독공연하는 ‘한국현대희곡 드라마 리딩’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카운터 파트너로서 한일연극교류협의회가 발족해 2003년부터 일본 현대희곡을 한국어로 번역해 낭독공연한 뒤 출판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양국에서 각각 50명의 극작가와 50편의 희곡이 소개됐다.

두 단체는 20년간 번갈아 행사를 진행하며 한·일 연극 교류의 중요한 창구가 됐다. 하지만 각각 10회까지만 진행하기로 한 합의에 따라 오는 11~13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열리는 ‘제10회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을 끝으로 행사 자체는 마무리된다. 앞으로 한·일 연극 교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지난 4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한일연극교류협회 회장인 연출가 심재찬과 전문위원으로서 양국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해온 번역가 이시카와 쥬리를 만났다.

“한·일 연극계에서 낭독공연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때 3회까지 하는 게 목표였어요. 양측의 반응이 좋아서 5회로 늘렸다가 다시 10회로 늘린 거예요. 다만 10회까지 마쳤다고 해서 교류를 끝내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이번 서울 행사를 끝낸 뒤 양측이 회장단의 세대교체와 함께 교류 방식의 변화에 대해 논의할 예정입니다.”(심재찬)

한일연극교류협회의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은 2년 전 9회까지 진행되는 동안 지원금액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1번은 블랙리스트 여파로 아예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본 연극 전문가로서 희곡 선정 및 번역에 참여하는 전문위원들의 재능 기부는 물론 갹출도 빈번했다. 10회 행사도 지난해 지원금 공모가 올해로 미뤄지는 바람에 행사부터 먼저 치러야 했다.

“한·일 양국에서 희곡 낭독공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데는 공공극장이 공동개최로 나서준 공이 큽니다. 공공극장의 이해와 협력 없이는 양국 연극계의 채산성 없는 풀뿌리 교류가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이시카와)

양국의 낭독공연에서 소개된 희곡은 본 공연으로도 많이 이어졌다. 한국 희곡이 일본에서 공연되는 것보다 일본 희곡이 한국에서 공연되는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국에선 일본의 영향을 받은 ‘조용한 연극’ 붐이 한동안 이어졌고 연말에 발표되는 ‘올해의 연극상’ 후보로 일본 희곡을 무대화한 작품이 적지 않게 올라갔다. 한국에선 ‘현대일본희곡집’이 정식 출판돼 서점과 국회 및 대학 도서관에서 언제든 볼 수 있지만, 일본에선 정식 출판이 되지 않아 일한연극교류센터를 통해서만 구입 가능하다는 점이 배경으로 꼽힌다.

“일본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1970년대부터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강한 연대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일본 연극인들은 희곡 낭독공연에서 남북문제나 광주항쟁 등을 소재로 한 사회정치적 작품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이런 작품을 일본의 일반 관객이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극단 워크숍에서 주로 공연됐습니다.”(이시카와)

그러나 일본에서도 근래 한국 희곡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대중적으로 더 자주 접할 수 있게 됐다. 대형 프로덕션인 호리프로가 2016년 이강백의 ‘북어 대가리’를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날 보러 와요’ ‘꽃의 비밀’ 등 한국에서 인기 있었던 작품을 일본 제작사들이 잇따라 무대에 올리고 있다.

2020년엔 나토리사무소가 제작한 이보람의 ‘소년B가 사는 집’(연출 마나베 다카시)이 일본 문화청예술제상 연극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한국 희곡을 무대화한 작품이 일본에서 권위 있는 연극상을 받은 첫 사례다. ‘소년B가 사는 집’은 일한연극교류센터가 2019년 희곡 낭독공연에서 처음 소개한 작품이다.

“최근 일본의 여러 제작사가 상업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큰 한국 희곡을 찾고 있습니다. 한국 작품을 일본에 꾸준히 소개해온 단체들의 노력과 한류 붐이 맞물린 결과입니다. 한국 희곡의 저작권료가 영미권과 비교해 높지 않은 데다 일본과 정서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많은 것도 이유입니다.”(이시카와)

한·일 연극교류를 통해 양국의 근대사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일본 극작가들이 이를 소재로 한 작품을 내놓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일한연극교류센터 위원으로 일본에서 주목받는 극작가 겸 연출가 시라이 게이타는 2020년 윤동주를 소재로 한 ‘별을 스치는 바람’, 지난 1월엔 명성황후 시해를 다룬 ‘어느 왕비의 죽음’을 무대에 올렸다.

심 회장은 “한국 연극계가 일상성과 개인의 감각에 주목한 일본 희곡에 영향을 받았다면 일본 연극계는 한국의 묵직한 정치·사회적 주제의 희곡에 감화를 받았다”며 “한·일 연극계는 서로 협력하고 보완하는 좋은 파트너”라고 말했다.

글·사진=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