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웅빈 특파원의 여기는 워싱턴] 워싱턴의 속마음

입력 2022-02-09 04:06

“베를린, 우린 문제가 있습니다.” 지난달 말 주미 독일대사 에밀리 하버가 자국에 보냈다는 메모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독일의 소극적 대응이 미국에서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일종의 동향 보고서다. 독일 슈피겔이 메모를 입수해 보도했는데, 내용을 보면 “독일은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논쟁에서 노리개가 되고 있다” “미국에서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불신받고 있다” 등의 적나라한 표현이 사용됐다. 공화당원은 ‘독일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동침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는 유럽 동맹과 협력하려 애쓰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을 겨냥한다는 분석도 담겼다. 러시아 제재에 미온적이었던 독일이 바이든 정부 비판을 위한 도구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하버는 트럼프 정부 때인 2018년 6월부터 주미 독일대사를 맡아왔다. 러시아 터키에서도 근무했고, 내무부와 외교부 차관까지 지냈다. 엘리트 베테랑 외교관에겐 독일에 대한 미국의 부정적 분위기가 가져올 파장이 눈에 선했던 모양이다. 슈피겔은 “하버가 이 메모에서 베를린에 엄청난 피해가 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고 전했다. 물론 바이든 정부는 이를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가깝고 강력한 동맹국”이라며 동맹 전선에 이상이 없다는 외교적 수사(修辭)를 반복해 왔다.

하버의 메모는 그러나 미국 조야의 분위기를 직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신은 우크라이나 주변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동안 독일의 모호하고 미적거리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우려해 왔었다. 미·독 정상회담이 열린 7일(현지시간)에도 이런 의문이 쏟아졌고, 바이든 대통령은 “독일은 믿음직한 동맹”이라는 해명을 여러 번 되풀이해야 했다. 하버 메모를 보면 국제 관계에서 외교적 수사와 실제 속마음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은 그 속마음에 좌우된다는 것도 뼈저리게 다가온다.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주변의 군사적 긴장에 관여하는 태도가 완강한 데 대한 해석도 비슷하다. 바이든 행정부는 유럽 동맹에 대한 보호, 민주주의 지원 등의 표면적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가디언은 “푸틴 대통령과의 대결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베이징에서 대만에 대한 치명적인 약점으로 읽힐 수 있다는 걸 바이든 대통령은 알고 있다”며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정말 위협하고 있는 건 러시아가 아닌 중국이라고 분석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부끄럽고 무기력한 퇴각 이미지를 전환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평가도 많다. 외교적 수사와 속마음의 괴리다.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한·미는 안보 동맹을 넘어선 포괄적 동맹 관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청와대와 주미 대사관은 한·미 관계가 어느 때보다 좋다고 열을 올린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 속마음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몇몇 장면이 등장했다. 미 의회조사국(CRS)이 지난 3일 공개한 ‘대북 외교 현황’ 보고서에는 “어떤 분석가들은 바이든 정부가 (대북 정책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라고 규정한다”는 대목이 나와 있다. 보고서 작성자는 한·미 간 대북 정책 이견이 표면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바이든 정부가 서울과의 공조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북) 관여를 위한 노력에 실질적 내용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도널드 커크 동아시아 전문기자는 미 정치전문매체 ‘더힐’ 기고문에서 “바이든 정부는 주한 미국대사 지명을 미루며 종전선언에 마뜩잖은 마음을 조용히 드러낼 수 있었다”고 표현했다. 워싱턴에서 청와대로 보낸 메모에 어떤 정세 진단이 담겨 왔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전웅빈 워싱턴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