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다른 사람

입력 2022-02-09 04:05

사람은 모두 같고 또 모두 다르다. 종(種)으로서 사람은 같고, 개별적 존재로서 사람은 다르다. 사람이 같다는 것은 생명의 가치와 무게에 대한 발언이고, 다르다는 것은 개성과 성향에 대한 것이다. 같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고 다르다는 것은 현상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도 맞고,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다’는 말도 맞다. 본질적인 같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다르며, 현상적인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같다. 동일한 생명의 가치와 무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다르며, 제각기 다른 개성과 성향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같다. 그 다름으로 사람의 같음을 부정할 수 없고 그 같음으로 사람의 다름을 통제할 수 없다.

다름에 대한 강조는 개인을 구별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중요하다. 전체 중 일부가 아니라 고유한 인격으로 존중받기 위해 중요하다. 창의성이 중요한 예술 영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한 사람의 주체적 존재가 되기 위해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한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함께, 옆에, 나란히, 그러니까 수평의 선 위에 다른 사람으로 있다. 이 선이 균형을 잃고 수직으로 바뀔 때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인식은 함께, 옆에, 나란히 있지 않고 따로, 위에, 우월하게 있다는 것으로 왜곡된다. 수평의 다름이 수직의 다름으로 바뀔 때 다름은 차별로 변모한다.

많은 부적절한 일들이 여기서 발생한다. 직업이나 생김새나 나이나 종교나 피부색의 차이가 차별의 이유가 된다. 수직의 다름은 이 차별을 정당화한다. 어떤 피부색은 우월하고 어떤 직업은 열등하다고 말해진다. 자기는 특별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하면 안 되는 일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는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능력으로 이뤘다고 생각한다. 자기에게 그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레비나스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 갈취한 것이다. 능력이라고 해도, 얼마나 많은 선천적 후천적 행운들이 그 능력을 만드는 데 동원됐는지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는 사도 바울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나쁜 것은 자기만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는 아니고 다른 사람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 때문에 나쁘고, 자기는 아니고 다른 사람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다른 사람의 태도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누구나 다르고 모두 특별하다는 점에서 사람은 같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정현종은 가르친다(방문객). 그것은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고,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기 때문’이다. 어떤 관계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특별한 나와 특별한 너가 만나는 것이다. 하나의 우주인 사람이 다른 하나의 우주인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나의 다름/ 특별함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다름/ 특별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신이 말하는 장소라고 했다.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나의 다름과 특별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다름과 특별함을 사유하라는 충고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정현종식으로 말하면,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을 헤아리라는 뜻일 것이다. 수직의 다름, 자기만의 특별함을 내세우는 사람은 이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