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난세의 아침에

입력 2022-02-08 04:03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지만 하루아침에 망한 것도 아니다. 서기 4세기 중반부터 로마, 특히 서로마는 왜 그보다 일찍 망하지 않았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부패하고 혼란스러웠다. 그야말로 난세였다. 국방은 게르만 용병에 전적으로 의지했고 국고는 텅 비어갔다.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이 물밀듯이 침입해오면서 제국은 풍전등화였다. 드디어 서기 476년 게르만족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소년 황제 아우구스투스 로물루스가 폐위되면서 공식적으로 서로마제국은 멸망한다.

난세는 새로운 제도를 잉태한다. 로마제국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했지만 전성기 로마와 같은 강력한 중앙권력을 확립한 경우는 없었다. 힘없는 농민들이 지방 세력가의 보호를 청하면서 봉건시대가 태동했다. 전성기의 화려했던 로마를 그리워하던 사람들에게는 암흑시대였다. 그사이 힘없는 사람들의 등대였던 기독교는 어느새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세속의 권력이 됐다. 이 모든 변화를 통틀어 중세 암흑기라 부르는 것은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는 중세를 암흑기라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로마가 봉건사회로 이행하면서 일견 정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로마의 중앙집권체제가 중세의 지방분권체제로 바뀌면서 정치와 경제, 사회 부문에서 경쟁이 심화됐다. 느렸지만 기술의 진보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다. 로마가 중세로 이행하는 과정과는 반대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지방분권체제가 중앙집권체제로 변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무수히 많은 전쟁의 난세가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서양의 난세는 새로운 변화를 지향해 가는 먼 항로였지만 우리와 중국의 그것은 거의 유사한 왕조의 되풀이였다는 사실이다. 몇천 년의 거울로 비추어 볼 때 정체 반복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 이 나라와 중국이 겪은 역경은 난세를 창의적으로 재창조하지 못한 역사의 귀결이었던 것이다. 난세는 역사의 순환이고 인간 집단의 본성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난세가 되풀이되면 국가든, 경제든, 사회든 모두 망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난세(亂世)다. 그동안 눈부신 경제 발전과 독재, 민주항쟁과 민주화, 촛불과 광우병,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이 있었다. 아파트가 몇 번 가라앉고 다리의 상판도 꺼졌다.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이 안 해본 것이 무엇인가. 이제는 심지어 권력을 감싸기 위해 권력기관까지 입맛대로 갈아엎었다. 권력과 관계있는 모든 범죄를 합법을 가장해 은닉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역병의 대유행으로 모든 것이 가려진 뒤에서 나라의 모든 권력을 틀어쥔 세력의 광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흘러간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보아야 할 곳은 앞이다. 이 난세에 휩쓸려 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변신을 도모할 것인가는 우리의 몫이다. 그럼에도 무심한 일월은 되풀이된다. 난세의 아침에도 무슨 전령인 듯 태양이 다시 뜬다. 눈을 헤집고 어느덧 복수초도 피었다고 한다. 명자나무와 동백에는 꽃망울이 맺혔다. 절정의 추위에 봄을 서두르는 저들을 보면서 우리의 5000년을 생각한다. 지금까지와 앞으로의 5000년.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기억되길 원하는가?

조장옥(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