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80여명이 줄사표를 냈던 지난해에 이어 올해 정기인사 시즌에도 70명이 넘는 판사들이 법복을 벗었다. ‘법관 엑소더스(대탈출)’ 현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법원 내부에서는 법관 인사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견법관들의 연이은 퇴직은 법률서비스 질적 저하, 재판 지연 등 민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법원은 지난 4일 법관 정기인사에서 52명의 판사가 퇴직한다고 밝혔다. 퇴직자 대다수는 지방법원 부장판사 이상급 중견법관이었다. 앞서 지난달 고위법관 인사에서는 20명이 사의를 표했고, 이 중 고등법원 판사 13명이 포함됐다. 현행 법관 인사제도에 문제점이 있다는 뒷말이 나오는 이유다.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가 줄지은 중견법관 퇴직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 제도는 수직적 인사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폐지됐으며, 현재는 균형 있는 1·2심 법관 분배를 위한 법관 인사 이원화 제도가 정착된 상태다. 그러나 이는 중견법관의 주된 퇴직 사유로 거론되기도 한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정책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실력 있는 법관들이 전통적으로 밟던 단계가 사라져 일할 동력을 잃기도 한다”며 “지금은 누가 고법 판사가 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판사 경력 15년 이상의 법관들은 조기퇴직 후 대형 로펌에 들어가 변호사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고법 부장판사급 이상의 고위법관은 퇴직 후 3년간 로펌 취업이 제한되기 때문에 법관으로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뒤 취업 제한에 걸리기 전에 법원을 떠난다는 것이다.
일선 법관이 투표를 통해 1~3명의 후보자를 압축하면 대법원장이 최종 임명하는 방식의 ‘법원장 후보 추천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절차의 공정성을 강조한 이 제도가 현실에서는 법관들의 사기를 저하하고, 오히려 대법원장의 인사권만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얘기다. 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과거에는 고법 부장판사들이 차례로 승진해 대법원장의 역할이 작았던 반면 지금은 대법원장이 입맛대로 법원장을 고른다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수평적 인사를 위해 큰 틀에서 법원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시각도 있다.
중견법관들의 퇴직이 결국 재판 지연 등 재판 당사자들의 손해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나왔다. 저연차 법관들이 당장 업무 공백을 메우기는 어려워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뜻이다.
박성영 기자 ps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