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앞두고 시할머니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렸던 김복동 할머니의 3주기 뉴스를 연휴 직전 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6월 항쟁 도화선이었던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의 별세 소식을 들으면서 시작된 생각인 것도 같다. 으레 힘든 시절을 사셨겠거니 하면서도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시할머니의 삶이 시대 그 자체라는 ‘각성’이 찾아왔다. 주민등록상 1924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올해 99세가 된 할머니는 한국 현대사 100년을 꼬박 살아낸 셈이었다. 할머니는 뵐 때마다 같은 말,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횟수가 확연히 늘었다. 할머니의 시대를 듣고 기록할 기회가 빠르게 사그라든다는 의미였다. 코로나19 때문에 고민하던 시댁행을 결국 결심한 데는 그 이유가 컸다.
마침 할머니는 부엌일을 한다고 종종대는 손주 며느리에게 연신 “야야, 이젠 내가 암것도 못 한다”고 미안해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할머니는 정말 그 시절을 어떻게 다 살아내셨나 저는 상상도 못하겠다”며 그래도 손부가 기잔데, 인터뷰 한 번 해주시라고 농처럼 여쭸다.
할머니는 2020년 3월 대구·경북지역 코로나 확산기 때 지인을 통해 감염됐다 기적처럼 2주 만에 완치돼 돌아왔다. 당시 기준 97세, 국내 최고령 완치자였던 할머니는 ‘희망의 아이콘’이 돼 온갖 매체의 조명을 받았다. ‘할머니 인터뷰’ 얘기는 그래서 농담 같은 진담이었다.
할머니는 “아이고마, 내가 요즘 암것도 기억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답을 하기 시작했다. 순서도 디테일도 허술했지만 질문이 과거를 향할수록 목소리엔 힘이 붙었다. 출생연도도 “모린다(모른다)”던 할머니는 “언니는 못 나왔어도 난 국민핵교(학교) 6학년까지 졸업했어. 그때는 일제 치하라, 내 이름 황영주가 일본말로 고에이수거든”이라 했다. 숫자는 사라졌어도, 일제 시절만큼은 할머니 기억에 분명히 남아 있었던 셈이다. “그 시절에 여자가 내맨큼 배운 사람도 없었어. 내가 저기(노인복지센터) 나가도 나(나이)가 젤 많은데 빠지질 않아. 젊은 사람들이랑 대화해도”라는 할머니 말엔 그때의 배움이 당신 인생을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힘이라는 뿌듯함이 깔렸다.
열아홉에 시집 간 할머니의 신혼집은 미아리고개에 있었다. 평생 경북에만 사신 줄 알았던 할머니의 서울 생활 얘기에 놀라자 “할애비(할아버지)가 큰 회사에 다녔잖나. 내가 그래도 센수(센스)가 있어(잘살았지)”라고 했다. 격변의 시기를 산 할머니에게 서울살이쯤은 별일도 아닌 듯 말이다.
하지만 서울살이는 ‘두 번째 난리 때’ 끝났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한 번 함락됐던 서울을 되찾았다 이듬해 1월 다시 빼앗겼을 때다. 난리 통에 남편을 잃은 할머니 배 속엔 막내아들이 있었다. “하나(큰아들)는 손에 잡고, 다른 하나는 등에 업고, 하나는 배에 있고. 미아리 거기 굴에 오래 있었어. 낮에 들어갔다가 밤에 나오구.” 결국 고향 친정집으로 피난 온 할머니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비단을 떼서 파는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거서 보따리 지고 군위 하양(읍) 와서 팔고 그렇게 살았지”라는 할머니 말에 지도를 검색하니 지금 길 기준 차로 약 1시간, 걸어서는 6시간이 넘는 거리다.
내겐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 아득한 무게의 세월을 몇 안 되는 문장으로 전하면서도 한 번 울컥하지도 않은 할머니는 그저 “내사 진짜 맨주먹이었지. 니한테 이리 말하니 속이 참 시원하다”며 껄껄 웃었다. 때론 이를 악물고, 때론 숙명처럼 덤덤히 그 세월을 견뎌온 할머니의 맨주먹이 그제야 보였다.
조민영 온라인뉴스부 차장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