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 치트키’ 김태호 PD와 이효리가 만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티빙은 설 연휴 첫날 파일럿 형태의 예능 ‘서울체크인’을 선보였다. 프로그램은 공개 당일 티빙 전체 콘텐츠 중 유료가입 기여자 수(해당 콘텐츠를 보기 위해 가입한 유료구독자 수) 1위를 기록했고, 정규 오리지널 제작이 확정됐다.
무릎 나온 트레이닝 팬츠 차림에 백팩 하나 달랑 메고 제주도에서 상경한 이효리는 “늙어서 보기 싫다”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 크루들과 함께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MAMA) 무대를 ‘찢었지만’ “애들은 리허설을 몇 번 해도 지치지 않더라”며 어쩔 수 없는 체력의 한계를 토로했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언니’들의 대화는 화제가 됐다. 이효리는 처음 보는 어린 스태프와 가수들 사이에서 자신만 늙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언니가 있어서 좋다. 언니는 언니 없이 어떻게 했느냐(버텼느냐)”는 질문에 “몰라. 그냥 술 마셨어”라고 답하는 엄정화를 보고 이효리는 눈시울을 붉혔다.
인기의 최고점을 지나온 다른 언니들도 이효리와 만난 자리에서 각자의 감정을 밝혔다. ‘아시아의 별’ 보아는 “좋은 본보기로 계속 있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다”고 했다. ‘한국의 마돈나’ 김완선은 “이제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종영한 tvN 예능 ‘엄마는 아이돌’은 가요계의 경력단절여성을 조명했다. 무대를 떠나 아이를 키우던 전직 아이돌들은 매회 울었다. 예전만큼 실력이 나오지 않을 때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확인할 때도 울었다. 응원차 출연한 가수 겸 제작자 박진영은 원더걸스 출신 선예가 은퇴 후 엄마와 아내로서만 살아온 데 대해 “자기가 내린 선택을 옳은 선택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라고 헤아렸다.
오롯이 나 자신뿐인 삶을 오랜만에 되찾은 언니들의 눈물은 보는 사람의 심경을 복잡하게 했다. 사람들은 “역시 경력을 무시 못한다”는, 차마 웃을 수 없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현실적인 여건 탓에 자기 자신은 멈추고 ‘역할’에 집중해야 했던 언니들은 TV를 보며 덩달아 눈물을 쏟았다.
개봉을 앞둔 영화 ‘355’는 다이앤 크루거와 페넬로페 크루스, 제시카 채스테인, 루피타 뇽오, 판빙빙이 주연을 맡았다. 각자 다른 개성과 필모그래피를 가진 여배우들은 극중에서도 경험에서 우러나는 ‘깡’을 보여준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걸 언니들은 안다.
노련하게 적들을 처치한 뒤엔 “내 첫 임무는…”으로 시작하는 ‘라떼’가 이어진다. 험지에서 버텨 온 언니들이 풀어낸 라떼는 허세가 아니다. 더 완벽해야 했다는 아쉬움, 어떻게든 견뎌내야 했다는 고백이다. 한바탕 눈물과 박장대소가 지나가면 또 다른 결전의 시간이 닥친다. 인생의 어떤 과제도 피할 순 없다는 듯이.
내 현실은 누군가의 과거였고, 누군가의 미래다. 인간의 이야기는 언제나 되풀이된다. 그걸 알면서도 늘 세대 차이를 이야기하고, 세대 간 갈등은 계속된다. 입 밖으로 내뱉든 그렇지 않든 ‘꼰대’와 ‘요즘 MZ세대’의 구도가 만들어진다. 꼰대는 여유와 경력을, 요즘 MZ세대는 생기와 자신감을 현명하게 뿜어내지 못한다고 서로 불평한다.
이런 주제로 이야기할 때면 영화 ‘은교’에서 시인 이적요 역을 맡은 배우 박해일의 대사가 떠올라 피식 웃곤 한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얻은 벌이 아니다.” 그렇다. 상이나 벌이 아니라 각각 깜냥과 장단점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노화는 20대부터 시작된다. 노화와 세대교체를 거스를 수 없다는 데서 일말의 서글픔도 시작된다. 그건 단단한 자아와 산전수전 경력으로 메워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더 많은 언니들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 세대는 그다음 세대를 위해 그런 언니로 현실에 생존해야 한다.
임세정 문화체육부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