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봐서 그 맘 알지”… 후배 스타트업에 손 내미는 선배들

입력 2022-02-05 04:05

2014년 미국 UC버클리대와 UC샌디에이고대의 심리학자 4명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한 식당 계산서에 특정 문구를 적어놓고 손님의 반응을 살폈다. 문구는 다음과 같다. “앞에 오신 손님이 당신을 위한 선물로 식사비를 대신 내주셨으니 그냥 가셔도 됩니다. 당신도 다음 손님을 위해 익명으로 식사비를 내줄 수 있어요.”

결과는 놀라웠다. 손님들이 자신의 밥값보다 더 많은 돈을 낸 것이다. 이 연구논문의 제목은 ‘(다른 이를 위해) 미리 계산할 때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Pay more when you pay it forward)’이다. 이후 ‘페이잇포워드’는 성공한 창업자가 신규 창업자에게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는 실리콘밸리 문화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하는 문구가 됐다.

페이잇포워드 문화가 한국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이 된 ‘선배’ 스타트업이 신규 창업자에게 자금을 투입하거나 사업 노하우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후배’ 스타트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모바일 금융서비스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는 스타트업 경진대회 ‘파운드(FOUND)’를 열기로 하고 지난달 23일까지 참가 신청을 받았다. 파운드는 풀어야 할 문제를 발견하다는 뜻과 회사를 설립하다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비바리퍼블리카는 최종 우승팀 3곳을 선정해 10억원 규모의 투자를 하고 코칭, 파트너십 등의 혜택도 제공한다. 비바리퍼블리카 관계자는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스타트업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대회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은 지난해 9월 ‘남의집’에 10억원을 투자했다. 남의집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오프라인 공간에서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커뮤니티 플랫폼이다. 지역주민에게 동네에서 열리는 소규모 모임, 작업실, 공방 등을 소개한다. 당근마켓은 2100만명의 이용자가 남의집 플랫폼으로 유입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김성용 남의집 대표는 “당근마켓과 남의집은 연결 기회를 확대해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겠다는 지향점이 같다. 이번 투자로 다양하게 도전할 수 있게 됐다. 각 지역의 로컬 크리에이터를 육성하고 이를 통해 지역경제까지 활성화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패스트벤처스는 예비창업자 교육 프로그램 ‘텍스트북(Textbook)’을 운영 중이다. 김슬아 마켓컬리 대표, 문성욱 블라인드 대표, 강석훈 에이블리 대표 등 16명의 성공한 기업가가 창업자에게 경험을 공유한다.

직접 벤처캐피털(VC)을 설립해 유망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유니콘 기업도 등장했다. 직방은 2020년 초 ‘브리즈인베스트먼트’를 설립해 프롭테크(부동산+정보기술) 분야에서 성장 가능성이 큰 스타트업에 투자를 시작했다. 직방과 우미건설이 각각 100억원을 출자했다. 지난해 3월 인테리어 플랫폼 ‘집꾸미기’에 투자했고 인테리어 가상현실(VR) 서비스를 제공하는 ‘큐픽스’, 공유주방 ‘고스트키친’ 등도 포트폴리오에 포함됐다. 직방 관계자는 “해외는 이미 프롭테크 생태계를 키우는 대규모 펀드가 조성돼 있는데 한국은 전무해 직방이 문을 열어젖힌 것”이라며 “프롭테크 생태계 전반을 성장시키는 게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상어 가족’ ‘핑크퐁’ 콘텐츠로 유명한 더핑크퐁컴퍼니는 2019년 스마트스터디벤처스를 설립해 영화·공연·게임 등의 콘텐츠 스타트업에 자금을 넣고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레드독컬처하우스’, 아이돌봄 앱 스타트업 ‘째깍악어’, 캐릭터기업 ‘키키히어로즈’에 투자했다. 지난해 7월 450억원 규모의 ‘베이비샤크넥스트유니콘IP펀드’를 결성해 상어가족과 핑크퐁을 잇는 차세대 콘텐츠 스타트업 육성에도 나섰다.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자체 VC ‘무신사파트너스’를 운영한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지오그래픽, 안다르, 플랙 등에 50여건의 투자를 집행했다. 잠재력 있는 신진 브랜드를 지원하기 위해 패션 특화 공유오피스 ‘무신사스튜디오’도 갖췄다.

지분 투자, 인수·합병(M&A)이 아닌 VC 투자는 스타트업 창업자에게 매력적이다. 투자자가 지분을 가져가면 경영 독립성을 보장받지 못할 수 있어서다. 한 VC 관계자는 “사업을 잘 이해하는 VC가 투자하면 투자사 모기업이 쌓아온 생태계를 성장에 활용할 수도 있다. 스타트업의 호응도가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스타트업 창업에서 유니콘으로의 성장까지 통상 8~10년이 걸린다. 투자 유치 과정은 험난하다. 유니콘 반열에 오른 스타트업들이 페이잇포워드 활동을 하는 건 이미 겪어본 ‘선배’가 ‘후배’의 시행착오를 줄여 최대한 빨리 안착할 수 있게 돕는다는 의미가 크다. 시장을 키우고 동반성장도 가능하다. 한국벤처투자가 발간한 ‘2021년 VC 트렌드 리포트’는 “최근 정책자금과 투자재원 규모가 확대되면서 유능한 인재들이 스타트업으로 몰리고 엑시트(투자회수) 기회도 많아졌다. 올해도 스타트업 열풍은 지속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