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공중도덕심 없는 공공질서?

입력 2022-02-04 04:08

“공중도덕심 없는 공공질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실린 저자 주(註) 가운데 나오는 문구다. 이 문구를 인용한다고 해서 토크빌의 저서와 관련된 담론을 다시 꺼낼 마음은 없다. 다만 이 표현이 담고 있는 모순이 문장상으로는 분명하게 보이는데 막상 삶의 현장에서는 절실하게 느껴지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과연 개인이냐 집단이냐는 논쟁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만큼 양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과연 좋은 시민 없이 좋은 시민사회가 가능할까? 좋은 시민과 좋은 시민사회 중 어느 것이 먼저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전자가 없는 후자가 존재할 수 있을는지.

거시적 맥락에서 오늘날은 시간적으로는 후기근대사회, 공간적으론 시민사회다. 시민사회 기원은 고대, 중세, 근대 등 다양한 시기로 소급될 수 있지만 시민사회가 일상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시민사회의 특성과 특질은 시민에게 거의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흥미로운 사실은 좋은 시민사회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만 스스로 좋은 시민이 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시민의 익명성은 다중의 무책임으로 쉽게 변질된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공중도덕심 없는 공공질서” 곧 좋은 시민 없는 좋은 시민사회라는 ‘비현실적인 현실’을 이어가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시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은 단기적으로는 집단적 자기기만이고, 장기적으론 필연의 복수를 외면하는 무모함은 아닌지.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이 모순의 수렁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개인적 접근부터 집단적 접근까지 수많은 지성인이 다양한 해법을 내놓았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이런 문제의 해결자로 여겨지던 당사자들이 오늘날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교육, 경제, 정치, 여론, 법, 종교 등 무엇 하나 자신 있게 내세우기가 조심스럽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종교계에 대한 토크빌의 뼈아픈 비평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어느 종교가 역사상 모든 시기에 같은 형식으로 나타나는 감정이나 성향에 기초하는 한, 그 종교는 오랜 세월을 견디어나갈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또 다른 종교에 의해서만 파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세속의 이해관계에 집착할 경우 그것은 세속권력이나 거의 마찬가지로 취약한 것이 된다. 종교가 정치권력과 맺는 동맹은 그 자신에 불길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종교가 그 생명을 지속시키는 데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며 또한 세속권력에게 종교가 도움을 줌으로써 종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종교가 엉뚱한 욕심을 부리다간 다른 종교에 대체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라져 버린다는 경고다.

대선 정국에서 종교가 또다시 문제가 되고 있다. 자칫 이런 상황이 종파 간 갈등으로 호도될까 걱정된다. 문제는 어떤 종파냐가 아니라 각 종파가 정치와 건전하고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느냐다. 종교의 정치에 대한 건전한 참여 및 비판은 음험한 결탁 및 요설과는 다르다. 종파 불문하고 종교는 정치를 넘보지 말고 정치도 종교를 끌어들이지 말 일이다. 이 시점에서 종교는 자신의 진정성을 성찰하고 본연의 역할인 좋은 시민 육성에 분발해야 한다.

물론 좋은 시민사회를 만들 최종적 책임은 시민 각자에게 있다. 한국인은 과연 자신에게 공공질서에 필요한 공중도덕심이 있는지, 그것을 함양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좋은 시민이 될 수 없고, 좋은 시민사회의 일원이 될 수도 없다. 남이 해 줄 일도 남에게 넘길 일도 아니다. 한국이 선진국에 공식 진입한 지도 해를 넘겼는데 여전히 불신, 불안, 불만의 삶이 매일 이어지고 있다. 공중도덕심을 지닌 좋은 시민이 되는 것이 애국이요 애족이다.

안교성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