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 익숙한 시대… 잃어버린 나의 또 다른 반쪽을 찾아서

입력 2022-02-04 03:05 수정 2022-02-04 21:58

“아빠, ‘눈싸움을 자주’ 하래?”

저녁을 먹고 거실 한쪽에서 종이비행기를 만들던 아들이 기계음으로 흘러나오는 관리실 안내방송을 듣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습니다. 가만히 들어 보니 “동파 방지를 위해 ‘물 사용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멘트였지요. 아내와 마주 보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일곱 살 아이의 마음속엔 아마도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던 몇 주 전 그날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열여덟 살에 읽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한 문장 역시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제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내 목표는 언제나 내가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터전, 나의 기질이나 개성이나 재능이 가장 잘 펼쳐지고 작용할 수 있는 터전을 찾아가는 거야.”

그저 대학이나 전공, 직업 선택이 유일한 목표였던 시기에 ‘아, 이런 목표를 가질 수도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무미건조한 양자택일의 구조에서 잠시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MZ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MBTI처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마치 인간의 특정 유형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이성과 정신세계, 금욕의 삶을 표상하는 나르치스가 한쪽에, 감성과 자유분방함, 예술가적 삶을 표상하는 골드문트가 다른 한쪽에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재능을 타고난 나르치스는, 자신처럼 수도사가 되려 하는 골드문트의 본성을 에워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을 벗겨내도록 돕습니다.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은 모성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그들의 삶은 충만해 있고, 사랑의 힘과 체험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지.”

결국 골드문트는 방랑과 자유, 감각과 예술의 세계를 찾아 떠납니다. 수많은 여성의 이름과 도시 풍경, 흑사병과 살인, 몇 점의 조각상 등이 이후로 펼쳐질 그의 삶을 함축하지요.

시간이 흘러 지치고 쇠락한 모습으로 골드문트가 나르치스와 재회했을 때 나르치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건 자네 덕분일세.” 정반대의 길을 걸었지만, 사실 두 사람의 본성은 서로의 “잃어버린 또 다른 반쪽”이었던 것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말이 익숙해져 버린 시대입니다. 목표가 다르고 기질과 방향이 서로 달라도, 존재와 존재가 얼굴을 마주하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고 공존하는 관계와 공동체를 이루는 ‘그날’이 그저 한 이상주의자의 꿈에 불과하지는 않겠지요. 당신의 삶의 조각들이 누군가의 인생에 가닿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문준호 편집팀장(출판사 복있는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