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새해, 새 나이

입력 2022-02-05 04:08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 나이로 살아간다. 나이를 먹는 건 예습도 복습도 할 수 없기에 해마다 마주하는 첫 나이가 어색하고 낯설다. 달라진 건 내가 아니라 나이인데 그에 맞춰 무언가는 반드시 변해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서른을 넘기고 난 뒤에는 더욱 그렇다. 한 살 한 살의 무게가 분명 숫자 1만큼의 것은 아니어서 앞으로 삼켜야 할 나이들을 생각하면 막연히 두려워진다. 우리나라가 두 개의 나이를 쓰는 건 한국식 나이와 만 나이를 오가며 천천히 적응하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도 해본다.

나이에 따라 위계질서를 나누는 한국에선 나이가 많을수록 그 숫자가 유세가 되기도 하고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해가 바뀔 때마다 나이 먹는 걸 진정으로 기뻐하는 이는 드물다. 나이에 맞는 대접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제 나이로 보이는 건 원치 않는 아이러니를 일상처럼 접한다.

아마도 ‘나이’와 ‘나이 듦’은 우리 마음속에서 다르게 작동하는 것 같다. ‘나이’가 상하 관계를 규정짓고 호칭을 결정하는 사회적 기준이라면 ‘나이 듦’은 늙어가는 과정, 즉 개인의 노화와 연결된다. 최은주 교수는 ‘나이 듦: 유한성의 발견’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나이 듦을 연상할 때 늙음 그 자체를 먼저 떠올리고 그다음으로 체력 저하와 같은 신체 변화를 떠올린다고 분석한다. 나이 들수록 쌓이는 성취나 경험은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고 육체적 쇠락과 노화에 주목하다 보니 ‘나이 듦’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얘기다.

작사가이자 방송인인 김이나는 에세이 ‘보통의 언어들’에서 나이 듦에 팽배한 혐오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잇값을 못 하고 설친다’는 비난은 얼마나 많은 늦은 용기를 주저앉히던가. 비난이 마땅한 경우일지언정 그 원인은 그 ‘사람’에게 있지 ‘나이’에 있지 않다.”

생애 주기로 보면 겨우 3분의 1 정도 걸어온 내가 나이 먹기를 두려워하는 배경도 어쩌면 여기에 있다. 취업 결혼 출산이라는 사회적 과업도 벅찬데 ‘나이에 걸맞은’ 행동과 책임을 잘 이행하고 있느냐 하는 물음까지 직면하기 때문이다. 소위 나잇값 하고 있는가 자꾸만 되묻게 되는 것이다. 한 살이 더해지는 순간 어떤 자격을 얻듯이 새 사람으로 거듭나면야 좋겠지만 현실의 나는 그저 어제와 오늘의 연장선, 차곡차곡 쌓인 세월의 결과물일 뿐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어른스러움이나 성숙함 같은 것들은 나이를 먹는다고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으니 직접 부딪치고 깨우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최 교수는 29세에서 30세가 될 때가 나이 듦이 가시화되는 시기라고 짚으며 “어쩌면 나이에 대해서 가장 진지하게 의식하는 때”라고 언급했다. 나이를 거꾸로 되돌릴 수 없듯이 한번 인식하고 의식해버린 나이는 지속적으로 인생의 숙제를 던져준다. 그 나이에 이루지 못한 무언가가 아쉽고, 이 나이를 먹도록 해내지 못한 무언가를 후회하며, 앞으로 어느 나이에는 무언가를 실현해야 한다는 목표와 다짐이 생긴다. 최 교수의 말처럼 “패배든 도피든 나이를 인식한다는 것은 엄청난 발견”임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필요한 건 상상력이다. 나보다 먼저 나이 들어본, 그중에서도 같은 여성인 ‘언니들’의 글에 유독 마음이 가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비혼의 프리랜서로 살아가며 어른들이 걱정할만한 요소는 다 갖췄다고 표현하는 황선우 작가는 에세이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통해 20대보단 30대가, 30대보단 40대가 점점 더 좋았다고 고백한다. “인생은 정말 긴데, 앞으로 점점 더 길어질 텐데, 젊음을 디폴트에 놓고 그것을 점점 잃어가는 서사로 바라본다면 모두가 지는 게임의 규칙 아닐까? 우리에게는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더 다양한 연령대, 더 많은 삶의 예시가 필요하다.”

나이를 먹으며 겪는 몸과 마음의 보편적 변화만큼, 나이를 먹으며 알게 된 새로운 좋은 것들이 많다는 작가의 조언은 숫자에 엉겨 붙어 있던 미련을 정리해주고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좀 더 담담히 바라보게 한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한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몇이든 사는 모습은 다르다고, 스스로의 태도가 그 차이를 만든다고 나 자신을 다독인다. “나이는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는 절대적 조건이 아니며, 던져버리고 극복해야만 하는 악조건도 아니다.” 조금은 의연하게 나이들 용기가 생긴다.


박상은 온라인뉴스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