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시민들이 피카소는 몰라도 백남준은 다 안다니까요.”
얼마 전 울산시립미술관 개관 기념전을 보러 갔을 때다. 울산시립미술관 소장품 1호인 백남준의 ‘거북’을 설명하던 학예사는 자랑스러운 듯 이렇게 말했다. 울산시 원도심에 신축된 미술관의 본전시도 볼만했지만 옛 방어진중학교 폐교 건물을 임시 전시장 삼아 선보이는 소장품전 ‘찬란한 날들’이 더 눈길을 끌었다. X세대 기수 이불,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참여 작가 김윤철 등 주요 작가 작품 30여점을 선보이는 이곳 전시의 압권은 ‘거북’이다.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의 작품이기도 했지만 길이 10m에 166개의 모니터를 갖춘 대형 걸작이어서다. 엎드린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반구대)에 새겨진 선사시대 반구대 암각화를 품은 산업도시 울산에서 백남준의 거북은 시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송철호 울산시장은 작품을 구입했을 때 직접 언론에 브리핑할 정도로 미술관 개관에 각별한 애정과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울산은 명색이 광역시다. 2018년까지만 해도 근로자 1인당 평균 연봉 전국 1위를 기록한 울산이다. 그럼에도 공립미술관이 없다니 문화적으로는 낙후됐다는 평가를 들어도 변명할 처지가 못 됐다. 실제 2016년 설문조사에서 시민 10명 중 6.7명이 전시 구경을 한 번도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술관 건립은 지자체장과 시민 전체의 열망이었다. 1월 6일 개관한 지 2주 만에 입장객이 2만8000명에 달하는 등 폭발적인 방문객 수치는 그런 열망의 방증으로 보인다.
울산시립미술관의 성공적인 개관 이면에는 열망만큼 꽤 길었던 준비 기간이 자리한다. 2015, 2016년 두 차례 개관 준비를 위한 국제세미나가 열렸다. 건립자문위원회의 자문회의도 십수 차례 있었다. 시는 ‘특이한 주제의 미술관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시민 의견(62.3%)을 경청해 기술도시 울산의 이미지를 살린 미디어아트로 특화했다. 전 백남준아트센터장 출신으로 미디어아트 전문가인 서진석 현 관장이 2019년 7월에 뽑혔고 그는 2년반 전부터 개관을 진두지휘했다.
여기서는 ‘소장품 기금’ 제도를 특별히 칭찬하고 싶다. 울산시립미술관은 전국 국공립미술관·박물관 가운데 유일하게 예산제가 아닌 기금제를 활용해 소장품을 구입한다. 2016년 울산시립미술관 운영에 관한 2차 국제세미나 때 일본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의 모델에 대해 발제를 한 유코 하세가와 도쿄도 현대미술관 예술감독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예산제는 필요한 경비를 먼저 결정한 후 그에 대응하는 수입액을 책정하며 1년 단위 회계연도에 따라 재원을 소진해야 한다. 반면에 기금제는 재원을 목돈처럼 적립할 수 있고 다음 해 이월도 가능하다. 기금제 덕분에 울산시립미술관은 소장품 구입비로 2017년부터 5년간 140억원을 적립했다. 이 가운데 70억원을 써서 120여점을 구입했다. 남은 예산은 올해 쓰는데, 다 못 쓰면 이월하면 된다.
백남준의 거북은 약 30억원에 사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대구(시립)미술관의 경우 소장품 구입 예산이 매년 15억원이었지만 2020, 2021년엔 5억원으로 형편없이 감액됐다. 부산시립미술관의 올해 소장품 구입 예산도 5억원에 불과하다. 울산시가 한 해 평균 28억원으로 소장품 구입에 과감히 지원하고 있지만 1년 단위 예산제였다면 작품 하나에 30억원이라는 거액을 쓰긴 쉽지 않다. 소장품 구입 예산이 40억원이 못 되는 국립중앙박물관은 최근 간송미술관이 경매에 내놓은 ‘금동삼존불감’(추정가 28억∼40억원)과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추정가 32억~45억원) 등 국보 2점 가운데 어느 하나도 사지 못했다. 소장품 구입과 관련한 울산시의 소장품 기금제 모델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