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피난처이다.” 18세기 영국의 평론가이자 시인인 새뮤얼 존슨의 명언이다. 이 문장의 출처인 ‘새뮤얼 존슨의 생애’를 쓴 제임스 보스웰에 따르면 존슨은 애국심 자체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은폐하고자 애국심을 사용하는 비열한 사람들을 비판했다. 물론 존슨은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나라든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보았다.
존슨의 입담을 통해 우리는 애국심이 사용되는 이중적 맥락을 발견한다. 애국자는 인간의 본능적 자기애를 극복하고 공공선을 목적으로 공적 활동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애국’이라는 상징이 숭고한 느낌을 풍기는 만큼, 애국심은 사적 이익을 미화하는 기만의 기제로 악용되곤 한다. 실제 역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정치 체제 혹은 비인간적 사건들은 애국심이라는 미명 하에 정당화되고 지지를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라는 인간 행위는 누구에게나 몹시 어려운 일이다. 정치인들은 악당이 최후의 도피처로 삼는 애국심을 자신의 말과 행동의 전면에 내세우는 위험을 매 순간 감행한다. 일반인은 그들의 언행이 진정한 애국심의 표현인지 아니면 자기나 당의 이익을 포장한 것인지를 공정하게 걸러내야만 한다. 진정성이냐 기만이냐를 놓고 혼란에 빠진 우리의 판단 능력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특정한 당파성의 논리를 내면화하기 일쑤다.
그래서 정치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 분열을 양분 삼아 움직이기도 한다. 이 땅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나는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다투게 하려고 왔다.”(마 10:35) 이처럼 ‘참 나라’에 대한 생각은 강렬한 에너지를 뿜으며 우리의 배타적 헌신을 요구한다.
특별히 국가를 책임질 대표자를 뽑는 선거 시절이 되면, 사람들의 가치가 충돌하며 사회 곳곳에서 갈등이 첨예해지고, 진실의 모양새를 한 가짜 뉴스가 판친다. 큰일을 앞두고 각기 다른 생각과 삶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없으리라 기대하는 순진함도, 정치로 인해 파생되는 분열을 너무 당연시하는 태도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정치가 ‘친구와 적’을 나누며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기법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만큼, 정치가 과잉된 곳에는 교묘한 기만의 수법이 없을 수 없고 거짓은 폭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정치 자체를 혐오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 권력은 하나님께서 타락 이전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 조건적으로 허락하신 것이라 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 지상에서 공존하며 평화를 어느 정도 누리려면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신앙인의 덕목인 셈이다. 하지만 나라에 대한 사랑이 과해지면 정치에 대한 신뢰가 우상숭배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고, 거짓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욕망을 더 혼란스럽게 하기에 갈등과 분열을 유발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덕분에 현실 정치의 ‘필요성과 한계’ 모두를 가식 없이 인지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곧 대선이다. 투표 결과 오직 한 명의 후보만 당선되기에, 선거는 많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특정 정치인이 공약하는 더 나은 사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의 ‘화해’를 삶의 참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단지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를 당선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거의 과정과 결과에서 일어난 ‘분열’을 대하는 방식에서 차별화된 정치적 사명을 보여줄 수 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싸우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그분을 구주로 삼는 그리스도인만큼 미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