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니 블루’가 전한 희망, 그래도 봄날은 온다

입력 2022-01-27 21:10 수정 2022-01-27 21:13
데이비드 호크니가 프랑스 노르망디의 시골 마을에 마련한 작업실 ‘그랑드 쿠르’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호크니는 2019년 3월부터 이 작업실에서 주변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시공사 제공

‘호크니 블루’라고 불리는 투명한 청색 바탕에 노란색 글자로 쓴 제목, 동그란 안경을 쓴 노인의 얼굴, 그리고 뒤표지까지 꽉 채운 화사한 벚꽃나무 그림. 표지만 봐도 기분이 밝아지는 책이다. 코로나19 전염병 속에서 겨울을 보내며 움츠러든 우리에게 봄이 곧 온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듯하다.

영국 출신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84)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작품 ‘미술가의 초상’(1972년 작)은 2018년 9031만2500달러(약 1020억 원)에 판매되며 생존 작가 작품으로는 최고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

“호크니는 미술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거의 줄곧 유명인사였습니다. 그건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좋은 일이라고도 할 수 없죠. 그렇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이기는 합니다.”

다른 미술가들, 심지어 유명 미술가들조차 무명의 휴지기를 경험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호크니는 근 60년간 관심의 초점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팔십이 넘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2020년 4월 1일 호크니는 아이패드로 그린 수채화와 정물화 몇 점을 영국 BBC로 보냈다. 그 작품들은 곧바로 타임스 가디언 등 주요 신문의 1면에 실렸다. 코로나19 뉴스가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방금 완성된 그림이 어떤 평가도 거치지 않은 채 주요 매체를 도배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호크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는 호크니가 2018년 10월에 보낸 “나는 노르망디에서 봄을 맞기로 마음먹었습니다”라는 이메일에서 시작해 지난해 10월 “나는 이곳에서 한 해 더 머물 작정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으로 끝난다. 호크니가 프랑스의 노르망디 시골 마을에 마련한 작업실 ‘그랑드 쿠르’에서 보낸 2년여의 시간이 담겼다.

이메일을 받은 이는 영국 주간지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의 미술 비평가 마틴 게이퍼드다. 호크니와 25년째 우정을 나누고 있는 친구로 둘은 ‘그림의 역사’ 등의 책을 함께 쓰기도 했다. 호크니는 자신이 그린 그림과 생각을 적은 이메일을 거의 매일 게이퍼드에게 보내줬고 게이퍼드는 이메일과 전화, 때론 영상통화로 호크니와 여러 얘기를 나눴다. 작업실을 방문해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번 책은 게이퍼드가 전하는 호크니의 최근 2년에 대한 이야기다.

“호크니의 삶과 미술은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실제 시간 속에서 여전히 진화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전기가 아니다. 이 글은 작품과 대화, 그 안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전망, 그리고 그것들이 내 마음속에서 일으키는 생각을 기록한 일기에 가깝다.”

책에는 호크니가 2019년 3월부터 노르망디에 머무르며 그린 신작들이 가득 담겨 있어 호크니의 전시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준다. 지난해 상반기 영국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열린 호크니의 신작 전시에 선보인 작품들이 다수 실렸다.

호크니의 신작들. 웅덩이의 풍경과 빗방울이 떨어지는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 물은 호크니가 평생 집중해온 소재였다. 시공사 제공

책은 호크니의 작품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가 어떤 생각을 작품에 담는지, 호크니 예술의 핵심과 인기 요인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게이퍼드는 호크니의 새로운 거처, 작업실, 작품들을 비춰가며 호크니의 삶과 예술을 유려한 문장으로 전한다. 색채와 선에 대한 호크니의 생각, 생활과 작업에 대한 그의 노동자적 태도, 그가 지속적으로 다루는 주제들과 연마해온 기술들도 풍부하게 소개한다.

호크니는 평생 색채와 투명성, 그리고 무엇보다 물에 매료됐다. 호크니는 1966년 ‘첨벙’(The Splash)을 그렸고 이듬해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을 그렸다. 수영장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을 묘사한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 됐다. 호크니는 수영장 그림에 대해 “나의 흥미를 끈 것은 수영장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물과 투명성이었죠”라고 말했다. 책에는 물과 비, 해, 달을 제대로 그려내기 위한 그의 탐구가 인상적으로 묘사돼 있다.

책에서는 호크니의 작품뿐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작가들, 피카소 고흐 모네 등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거장들의 작품과 호크니의 작품을 자유롭게 오가며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호크니 예술의 핵심부에 닿게 된다.

이 책은 한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코로나19로 봉쇄된 상황에서 호크니가 어떤 작업을 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봉쇄 속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봉쇄 속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넓혀준다.

이동제한령이 내려진 노르망디에서 호크니는 보름달 해돋이 빗방울 벚꽃나무와 주변 풍경 등을 그리며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작고 소소한 것들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합니다”라고 “세계는 아주아주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열심히 그리고 자세하게 보아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봉쇄의 시간이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관찰의 시간에 주목한다.

“봉쇄가 시작됐을 때 우리는 운 좋게 이곳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저 열심히 작업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리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을 관찰하고 있을 겁니다.… (친구인) 버트웰은 지금 시골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봄을 제대로 관찰하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이렇게 지금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고 있습니다.”

게이퍼드는 “코로나19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그에 따른 봉쇄가 이어진 이 시기 동안 호크니는 더 작고 작은 세상 안에서 더 많고 많은 것을 발견했다”면서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고 썼다.

“이곳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호크니가 코로나 시대의 갇힌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이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