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정부가 수립한 탈원전 정책은 유럽연합(EU)의 에너지 정책을 모델로 삼고 있다. 그러나 EU는 최근 원자력 에너지 정책 대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즉 원자력과 가스를 녹색 분류체계(Green taxonomy)에 포함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EU 집행위원회가 회원국과 유럽의회에 회람하는 위임규정(delegated regulation)은 올해 6월 말 이전 발효돼 회원국의 국내 입법 절차 없이 연말부터 전체 회원국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예정이다. 위임규정의 핵심은 2045년까지 신규 원전 건설을, 2040년까지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을 허가한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2050년에 온실가스 배출 제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작년 12월 31일 EU 집행위는 원자력을 ‘그린 택소노미’에 포함하는 위임규정 의정서를 발표했다. 집행위는 위임규정안에 대한 EU 전문가그룹 검토 의견을 21일까지 접수할 예정이며, 이달 하순쯤 유럽의회와 이사회에 위임규정 최종안을 송부할 예정이다. EU 회원국들은 4개월의 숙려기간을 갖고 찬반 의견을 제시해야 하며, 필요 시 추가 2개월의 숙려기간을 더 요청할 수 있다.
EU 규정에 의하면 이사회는 EU 인구의 65%를 포함해 72% 이상의 가중다수표(20개 회원국 이상), 유럽의회는 단순 다수결(353명 이상)로 위임규정 채택에 반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위임규정은 회원국들의 국내 입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동적으로 발효된다. 프랑스 폴란드 등 10개 국가들이 위임규정 채택에 적극 찬성하는 반면 독일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등은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원자력 옹호 국가인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재임 기간인 2008년 하반기 EU 의장국 수임 후 13년 만에 올해 상반기 EU 의장국을 수임하고 있다. 통상 EU 회원국들은 의장국의 이해관계를 존중하고 있다. 독일은 원자력 에너지를 포함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동시에 EU 통합의 쌍두마차인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 유지를 대유럽 정책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현실적으로 독일은 위임규정 저지를 위한 회원국들의 가중다수표 확보가 어렵다. 오스트리아는 EU 집행위가 위임규정 채택을 단행하면 유럽사법재판소에 집행위를 제소하겠다고 하지만 독일은 이에 동조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유럽의회의 경우 과반수 의원들이 위임규정 채택에 찬성하고 있다. 제반 정황을 살펴보건대 올 6월 말 이전 EU 집행위의 위임규정이 발효될 전망이다.
한국의 롤 모델이었던 EU가 원전 정책의 대전환을 추진 중임에 비춰 한국도 조속히 정책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탈원전 정책의 시시비비를 떠나 사용후핵연료의 안전한 관리를 강화하는 동시에 탄소배출 저감 목표 달성, 전기요금 인상 억제, 원자력기술 수출, 산업 활성화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비호 성균관대 국제개발협력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