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23개 해운사의 운임 담합에 과징금 962억원을 부과했다. 당초 검찰 격인 공정위 사무처가 제시한 8000억원에서 과징금이 대폭 줄어들었다. 정치권의 외압에 공정위가 원칙을 져버렸다는 비판도 있다. 이번 사건은 해운업계 첫 담합 제재지만 정치권에서 공정거래법 적용을 배제하는 해운법 개정안 통과가 유력시되면서 마지막 해운 담합 제재로 남을 공산이 커졌다.
공정위는 18일 고려해운 등 23개 국내외 해운사가 15년간 120차례에 걸쳐 한국-동남아 항로의 해상 운임을 담합했다며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총 962억원을 부과했다고 밝혔다. 공정위에 따르면 주요 국적선사 사장들은 2003년 10월 동남아와 중국, 일본 등 3개 항로에서 동시에 운임을 인상하기로 하면서 담합을 시작했다. 이들은 기본운임과 각종 부대운임, 대형화주에 대한 투찰 가격 등을 합의했다.
해운업계는 이러한 공동 행위가 해운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이뤄졌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공정위는 해운사들이 해운법에 있는 절차상 요건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담합이라고 판단했다. 해운법에 따른 공동행위로 인정되려면 선사들이 공동행위를 한 후 30일 이내에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신고하고, 신고 전에 합의된 운송 조건에 대해 화주 단체와 서로 정보를 교환해야 한다. 공정위는 이런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공정위에 해운 담합 신고가 들어온 2018년 9월 이후 3년 넘게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해운업계뿐 아니라 해양수산부, 국회 등에서 공정위 제재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이날 직접 브리핑에 나선 조성욱 공정위원장은 “이번 사건을 처리하면서 ‘화이부동’(和而不同·남과 사이좋게 지내되 의를 굽혀 좇지는 않음)이라는 사자성어를 많이 생각했다”며 과징금 부과 자체에 의미를 뒀다. 그는 “해운협회의 반발, 국회에서 해운법 개정 추진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며 “허용범위를 넘어서는 공동행위에 대해서는 공정거래법을 적용해서 엄정하게 법 집행을 하겠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알린 사건”이라고 자평했다.
해운법 개정안은 해운사들의 불법적인 공동행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방향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조홍선 공정위 카르텔조사국장은 “해운법상 절차와 내용(요건)을 거친 공동행위의 경우에는 공정거래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들어가는 식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며 “해수부와 큰 취지의 실무 협의는 어느 정도 됐다”고 말했다.
해운업계는 행정소송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한국해운협회는 성명서에서 “절차상 흠결을 빌미로 공정위가 해운기업들을 부당 공동행위자로 낙인찍었다”며 “행정소송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해수부 관계자 역시 “공정위 결정을 존중하지만 과징금을 매긴 데 대해서는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조사 중인 한-중 항로와 한-일 항로에서의 운임 담합 건에 대해서도 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심사보고서를 전원회의에 상정할 예정이다.
세종=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