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숙원인 재정준칙 도입이 사실상 이번 정권에서 불가능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내용면으로도 ‘홍남기표’ 재정준칙은 재정건전성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제어장치로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차기 정부에서 내실 있는 ‘한국형 재정준칙’ 추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2020년 10월 재정준칙 도입 계획을 밝힌 뒤, 같은 해 12월 재정준칙 도입을 위한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회에서 해당 법안이 제대로 논의된 적은 없다. 그 사이 국가채무 1000조원 시대가 도래했다. 올해 본예산 기준 국가채무는 1064조4000억원이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처음 50.0%에 도달한다. 현재 36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 터키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재정준칙을 도입하고 있다.
홍 부총리는 여전히 재정준칙 도입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정부가 ‘한국형 재정준칙’을 만들 때도, 홍 부총리가 한도 계산식 등에 관여했을 만큼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해당 법안을 심사해야 할 국회는 여야를 불문하고 별다른 관심이 없다. 특히 대선이 2개월여 앞으로 다가오고, 여야 대선 후보의 ‘돈풀기 공약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재정준칙 논의는 더욱 멀어져가는 모양새다. 여권의 연초 추가경정예산안 편성 압박도 커지고 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9일 “선거를 앞두고 돈을 거둬들인다거나, 돈을 덜 쓰겠다고 하는 것은 표를 떨어뜨리기 위해 작정하고 하는 얘기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다만 재정준칙 도입 필요성 여부와 별개로 정부가 제시한 재정준칙 내용이 적절한지를 짚어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재정준칙이 공개됐을 당시 여야 정치권, 언론은 너나 할 것 없이 각기 다른 이유로 강한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 재정 전문가들도 재정준칙 도입 자체는 긍정하더라도 정부가 제시한 안이 허술하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정부가 자체 개발한 ‘한도 계산식’의 적절성 여부, 예외조항 등 분명한 원칙·기준이 불분명하다는 점, 위기 후 복원 규정이 미미하다는 점 등이 주로 꼽힌다. 이정희 서울시립대 행정학 교수는 ‘재정준칙 해외사례 비교 및 국내 도입 방안 보고서’에서 독일·스웨덴 등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정부 재정준칙이 재정적자 허용 폭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총지출 제한, 국가채무비율 제한 등 재정준칙을 결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제언했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지난달 발간한 ‘예산정책연구’에도 경제위기 대응 재정준칙에 대한 연구 내용이 실렸다. 보고서는 정부 재정준칙안이 경제위기 대응 재정준칙의 외형적 틀은 일부 갖추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주요 요건을 대부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절하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전수경 국회 정책연구위원은 “곱셈 산식 등으로 ‘경우의 수’를 복잡하게 만들어 정책 집행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저해할 위험성이 지적된다”며 “준칙의 주요 내용을 대통령령에서 정하도록 하고 법률에는 위임 근거만 뒀다는 점에서도 엄격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재정준칙은 포퓰리즘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견제장치”라며 “다음 정권에서 재정준칙 도입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지금 정치권 모습을 보면 도입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우려가 든다”고 말했다.
세종=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