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기업 지원 두 기관, 본업은 뒷전 ‘영역 다툼’

입력 2022-01-06 04:03

수출기업의 어려움을 살펴야 할 한국무역보험공사와 한국수출입은행이 본업은 뒷전에 두고 밥그릇 싸움에 사활을 걸고 있다. 두 기관 노동조합이 소송전을 벌이고 있고, 주무부처의 수장들까지 나서서 자기 기관 감싸기에 나서는 형국이다. 기업들에 ‘갑’ 행세를 하면서 실적을 쌓고, 상대기관 견제에 급급한 두 수출신용기관의 통폐합 등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두 기관 왜 싸우나

두 회사는 국내 수출신용기관(ECA)이다. 기업들이 수출입 시 대금을 못 받는 등의 위험부담을 보증이나 보험을 통해 줄이는 게 두 기관의 존재 이유다. 수은은 보증·대출을, 무보는 보험을 담당한다.

이번에 갈등이 촉발된 것은 ‘대외채무보증’ 확대방안 때문이다. 정부가 지난달 13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수은의 대외채무보증 제한을 완화하겠다고 밝히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수은의 대외채무보증 상품은 해외 기업이 국내 제품 수입 시 구매대금을 대출받을 때 해당 채무를 보증해주는 제도다. 주로 건설·수주 관련 건이고, 대출을 받는 해외 기업은 국내 기업과 계약을 맺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국내 기업을 지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보는 ‘중장기 수출 보험’과 수은의 ‘대외채무보증’이 중복된다고 보고 있다. 쉽게 말해 수은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게 무보의 주장이다. 하지만 정부는 해외수주 관련 금융경쟁력이 취약한 상황에서 건설업계 등 수요자의 금융상품 선택권이 확대될 것으로 봤다.

정부는 수은의 총액제한 제약으로 해외수주가 무산된 사례가 최소 4건 이상, 121억 달러로 추정된다고 밝혔는데 무보는 이를 문제 삼고 나섰다. 무보 노조는 “보고서가 거짓으로 작성됐다”며 수은 감사실에 해당 보고서를 작성한 직원에 대한 감사를 청구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감사원 감사청구, 형사고발 의사도 밝혔다. 수은 노조도 무보에 맞서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이면에는 기재부와 산업부 간 기싸움

무보와 수은 간 갈등의 이면에는 기재부와 산업부가 자리잡고 있다. 수은은 기획재정부, 무보는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관이다. ‘파워풀(Powerful)’한 기재부와 ‘컬러풀(Colorful)’한 산업부는 전통적으로 물과 기름의 관계다. 두 기관의 수장도 해당 부처 출신이다. 무보 이인호 사장은 산업부 1차관 출신이고, 수은 방문규 행장은 기재부 2차관을 역임했다.

실제 지난 7월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부처 간 갈등이 표면화되기도 했다. 당시 기재부가 수은의 대외채무보증제도 개선안을 회의 안건으로 올리자, 문승욱 산업부 장관을 대신해 회의에 참석한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근거가 충분치 않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것이 바로 부처 이기주의의 전형”이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무보는 홍 부총리를 등에 업은 수은이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보고 있다. 반면 정부는 수은 보증 제한 완화는 두 기관과의 수차례 비공개 협의를 통해 결정된 사안인데, 무보 노조가 강경 일변도의 대응을 펼치는 것이 당황스럽다는 입장이다.

엉뚱한 경쟁에 한눈 팔린 정책금융기관

“수은의 대외채무 보증업무가 무보의 중장기성 보험과 겹친다. 이는 정책 재원의 효율을 높이고자 중복업무를 배제하는 기조에 배치된다.” 국회예산처가 2015년 ‘2014회계연도 공공기관 결산평가’에 적은 내용이다. 이처럼 무보와 수은 간 ‘업역 다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선거 전후로 정책금융기관 간 재편·통합 이슈가 늘 부상했다고 지적한다. 다만 제대로 된 해법 없이 논의는 제자리다.

두 기관은 원래 한 몸이었지만 1992년 무보가 수은에서 떨어져 나왔다. 무보·수은이 장기적으로 재통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남주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민간 금융기관은 상호 간 경쟁이 일부 필요하지만, 정책금융기관은 (수가) 제한적이어야 한다”며 “궁극적으로는 대외 산업정책금융을 담당하는 통합 공적 ECA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CA 기관이 복수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과 비슷한 ECA 구조를 가진 일본·중국은 업무 분장과 협력이 매우 잘되고 있다. 2013년 수은의 ‘한국 대외 정책금융의 효율적인 운영방안’ 연구용역을 수행한 현석 연세대 환경금융대학원 교수는 “정책금융을 ‘정치화’해 불필요한 경쟁을 조장하고, 줄세우기식 평가 환경을 만들어놓은 것이 근본 문제”라고 말했다.

서비스 마인드 없이 연봉 1억원

수은과 무보의 존재 이유는 ‘가능성이 있지만 금융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기업’을 도와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두 기관은 이런 마인드가 부족한 채 기업들에 ‘갑’ 행세를 하면서 실적을 쌓고, 타 기관 견제에 급급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이 자국 ECA를 활용해 국가별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공동 프로젝트를 하는 데 비해 한국 ECA는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도 꼬집는다. 현 교수는 “대외 경제정책과 정책금융의 큰 그림을 그리고, 방향을 제시하는 컨트롤타워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번 대선에서 기관 간 통합이나 업무 재분장 등 정책금융 재편이 핵심 어젠다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남 교수는 “정책금융기관 통합·개편 문제는 조직의 저항이 워낙 세기 때문에 10년, 20년이 지나도 해결이 어려운 문제”라며 “정권 초기 강력한 추진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수출업계 관계자는 “두 기관은 해외 수주 활성화나 기업의 입장에는 전혀 관심 없고, 본인들의 밥그릇에만 관심이 있다”고 비판했다. 2020년 기준 공공기관의 1인당 평균 연봉은 6931만원인 데 비해 수은은 9679만원, 무보는 9273만원이었다.

세종=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