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이후 북한 교회 김일성에 조직적 반발” 소련측 문서 나와

입력 2021-12-31 03:04
분단 후 북한 김일성에 저항하던 기독교인들의 구심점이 됐던 장대현교회의 1907년 모습. 교회는 일제강점기에도 태극기를 게양하며 민족 정신을 키웠다. 국민일보DB

분단 이후 북한의 교회들이 조직적으로 김일성에게 반발했다는 내용의 구소련 측 문서가 공개됐다. 문서는 1947년 5월 5일 북한 주재 소련민정청 키셀료프 소좌가 레베데프 당시 소련군정 정치사령관에게 보낸 보고서로, 북한 장로교 우익 세력이 주도한 반정부 활동과 친정부 조직인 북조선기독교도련맹(현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영향력 약화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러시아국방부 문서보관소에 있던 문서는 몇 해 전 군사편찬연구소가 수집한 뒤 북한사 연구자 윤경섭 박사가 자신의 논문에 인용하면서 알려졌다.

키셀료프는 “우익 개신교는 ‘북조선개신교연합노회’라는 비합법 조직으로 존속하고 있다”며 “20만명 이상의 개신교 신자를 포괄하는 조직으로 좌익 개신교가 소수인 것과 대비된다”고 썼다. 이어 “이들은 선교를 표방해 노동당과 인민위원회, 소련군을 반대하는 단체를 조직하려 시도했다”며 “지도자들도 검거했지만 활동이 약화하기는커녕 강력한 선동의 무기만 쥐여주고 말았다”고 전했다.

키셀료프는 “이들은 설교를 통해 정권을 공격하는데 공공연히 정권이 기독교 신앙을 박해한다고 말한다”며 “기독교 청년단체 위원장 조상일은 47년 4월 9일 ‘북조선에서 종교의 자유는 말로만 존재한다. 인민위원회를 반대한다’고 연설했고 체포된 지도자를 ‘순교자’로 부른다”고 지적했다.

장대현교회 풍경도 담겼다. 그는 “청년단체 소속 김두영이 대규모 집회를 제안했다”고 기록했다. 문서에 따르면 이 연설 이후 실제 평양에서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까지 참석한 가운데 3000여명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고 한다. 그는 “4월 22일 밤에는 서문밖교회에서 나온 800여명의 교인이 반정권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고 썼다.

한편 46년 조직된 친정권 북조선기독교도련맹에는 고작 6300여명의 교인이 있어 영향력이 없다고 했다. 키셀료프는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을 이끄는 박상순 박강수 강양욱의 잘못 때문이다. 북조선 목사 2000여명 중 단 46명만 여기에 가입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교회가 없어 영향력이 없다”고 우려했다.

문서 전문은 기독교사상(편집주간 김흥수) 1월호에 실렸다. 김흥수 주간은 30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분단 직후 북한의 개신교 실태와 김일성에게 반발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며 “북한 개신교 활동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의 문을 여는 자료로 활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