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 병정’처럼… 정동극장 정체성을 바꿨다

입력 2022-01-01 04:03
김희철 국립정동극장 대표가 최근 국민일보와 만나 극장의 정체성 전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민간과 공공 영역의 공연계를 두루 거치며 성과를 냈던 김 대표는 2019년 8월 정동극장에 온 이후 국립극장 승격 등 드라마틱한 변화를 끌어냈다. 이한결 기자

정동극장에서 지난해 3월 이름을 바꾼 국립정동극장은 공연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공연장이 됐다. 특히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1~3월)와 ‘포 미니츠’(4~5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6월)가 티켓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상설공연을 선보이던 예술단은 전통연희 전문 국립예술단체로 정체성을 규정한 뒤 미디어아트와 결합한 ‘소춘대유희’(10~11월)를 선보여 주목받았다.

국립정동극장은 개관 이후 27년간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2025년 3월 재개관을 목표로 오는 11월 재건축에 들어간다. 330석의 단관 극장이 662석의 중극장과 313석의 소극장을 가진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한다.

오는 11월 재건축에 들어가 2025년 3월 재개관 예정인 국립정동극장 조감도. 330석의 단관 극장이 662석의 중극장과 313석의 소극장을 가진 복합문화공간으로 변모한다. 국립정동극장 제공

공연계의 예상을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변화는 2019년 8월 김희철 대표(당시 극장장) 취임 이후 벌어진 것이다. 3년 임기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는 김 대표를 여러 차례 만나 도약을 끌어낸 비결과 향후 계획을 들어봤다.

김희철 대표가 세운 4가지 목표

“경영자의 역할은 조직원이 각각의 역할을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동극장에 온 뒤 4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째는 국립극장 승격, 둘째는 재건축, 셋째는 2차 제작극장 역할, 넷째는 전통연희 전문 예술단 전환이었습니다. 다행히 3년 임기 동안 4가지 목표를 달성했거나 진행하고 있어 기쁩니다.”

정동극장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의 복원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담아 1995년 개관했다. 개관 초기엔 공연장의 문턱을 낮추면서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여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사물놀이 한국무용 국악으로 구성된 ‘찾아가는 공연’을 하고 외국인 관광객 대상의 공연도 만들었다. 2000년 이후 기획공연과 함께 전통예술 상설무대가 관광상품과 연계돼 매일 1회씩 공연되다가 2010년부터 2회 상설공연에 들어갔다.

하지만 점차 관광객 대상의 비언어 퍼포먼스 공연들이 난립해 저가경쟁이 이어지자 정동극장은 2016년부터 변화를 모색했다. 관광객 대상 상설공연을 축소하고 전통 기반 제작극장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상설공연을 담당하던 예술단은 극장의 방향성에 반발해 단원 신분을 놓고 소송을 벌인 끝에 정규직을 인정받았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정동극장에 온 김 대표는 “존재감을 잃은 극장의 역할을 재정립하면서 직원과 단원의 자부심을 되살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김 대표는 KBS 삼성영상사업단 SJ엔터테인먼트 등을 거쳐 충무아트센터와 세종문화회관에서 근무한 공연 및 극장 전문가다. 특히 2004~2017년 충무아트센터 본부장으로 근무하며 대형 창작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흥행시키는 등 충무아트센터가 뮤지컬 전문 공연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민간과 공공을 두루 거치며 공연 제작과 극장 운영 경험을 한 것이 정동극장 운영에 큰 도움이 됐다. 내 별명이 ‘게르만 병정’이다. 목표가 생기면 앞만 보고 가는 스타일이라 붙은 것인데, 정동극장에 와서도 목표만 보고 달려왔다”며 웃었다.

국립정동극장 예술단이 지난해 10~11월 선보인 ‘소춘대유희’의 한 장면. 국립정동극장 제공

김 대표는 정동극장에 온 직후 극장장 대신 대표로 직함을 변경하며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2020년 전통 상설공연을 완전히 중단한 뒤 우수 공연을 선보이는 2차 제작극장으로 전환을 진행해 왔다.

“정동극장의 외국인 대상 전통 상설 공연은 2000년대의 니즈에는 맞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극장을 둘러싼 환경이 바뀐 만큼 공공극장인 정동극장의 정체성도 바뀌어야 합니다. 현재 공연계에서 정동극장의 역할은 콘텐츠 제공자이자 플랫폼이 돼야 한다고 봐요. 공공이나 민간의 창작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작품이 나오지만 97% 이상 사장되는 게 현실입니다. 좋은 작품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정동극장이 예산 인력 홍보 마케팅 등을 지원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대관보다 자체 기획하거나 외부 제작사와 공동제작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좋은 반응을 얻은 ‘베르나르다 알바’나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등이 그런 사례입니다.”

국립극장 승격 이후 달라진 것들

극장의 정체성 전환 작업을 진행하면서 김 대표는 정동극장을 국립극장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문화관광체육부와 꾸준히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문체부 산하 기관인 정동극장의 위상 강화 및 공공성 확대를 위해 ‘국립’ 명칭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공연계 여론도 정동극장에 우호적이어서 지난 3월 문체부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국립극장은 한 국가의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선도적 책임이 있습니다. 국민의 문화복지를 도모하는 한편 공연생태계에도 도움이 돼야 해요. 문체부를 비롯해 공연계 안팎에서 국립정동극장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공감대를 가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국립 승격 후 직원과 단원들이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극장의 비전에 적극적으로 함께하는 것도 큰 소득입니다.”

그동안 ‘뜨거운 감자’였던 예술단 문제도 자연스럽게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해 예술단은 소송을 통해 정규단원 신분으로 정리되기 전까지는 이름 없이 ‘공연단’으로 불렸다. 무용수 10명과 타악기 연주자 6명 등 16명으로 구성된 예술단은 전통연희 전문 국립예술단체로 방향을 잡았다. 단원들은 전통을 기반으로 다양한 창작물을 선보이는 한편 방방곡곡 사업 및 교육 프로그램에도 참여한다. 코로나19 여파로 지난 3월에야 창단공연 ‘시나위, 몽’을 내놓은 예술단은 단원들의 창작 플랫폼 ‘바운스’와 함께 두 번째 정기공연으로 한국 최초의 국립극장 협률사가 선보인 첫 유료공연 ‘소춘대유희’를 모티브로 한 동명 공연을 선보였다. 다만 예술단의 작업이 만족스럽다고 보긴 아직 어렵다.

“이제 막 첫발을 뗀 만큼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다만 그동안 새로운 시도에 목말라 있었던 우리 예술단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국내 국공립 예술단체는 정년 보장과 유명무실한 오디션 때문에 경쟁력 약화와 낮은 예술성이라는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는데, 정동극장은 단원들의 자기 계발과 창작활동을 독려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려고 합니다.”

예술단의 변화와 함께 극장 재건축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한 목표다. 국립정동극장은 2년이 넘는 공사 기간 정동길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을 장기 임대하는 한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등 다른 공연장을 대관해 공연을 올릴 계획이다. 지금의 국립정동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이 될 올 시즌에는 뮤지컬 4편, 연극 2편, 콘서트 2편, 발레 1편, 전속 예술단의 정기공연 3편 등 14편이 예정돼 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