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필통장관과 레임덕

입력 2021-12-30 04:08

현 정부 들어 고속 승진한 장관이 있다. 그는 차관 시절, 여성 과장에게 보고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필통을 던졌다. 필통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과장은 “지금 저한테 필통을 던지신 건가요”라고 따졌다고 한다. 이후 그 사건은 유야무야되고 그는 장관이 됐다. 여성 하급자에게 필통을 던졌다는 흠결을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정권에 충성했다. 청와대 하명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경제 부처의 한 1급 공무원은 대선을 앞둔 요즈음 자신의 동정을 신문 지면에 싣게 하라고 강압적으로 지시를 해 대변인실이 애를 먹고 있다. 한 장관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후배가 차기 정부에서 잘나가는 꼴을 보기 싫어 ‘미운 정’을 듬뿍 담아 정권 말 고위 공무원 후보로 추천했다. 이번 정권 사람이란 낙인찍기 시도인 셈이다.

공무원이란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은 정년이 보장된다는 점이다. 중차대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60세까지 꼬박꼬박 월급을 받고 퇴임 후에는 연금을 받는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대체적으로 새로운 일 만들기를 꺼린다. 일이라는 게 하다 보면 실패할 수도 있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욕을 먹기 마련. 거기에 정권에 구애받지 않고 소신을 지키며 일을 하면 위험은 더 커진다. “공무원도 영혼이 있다”는 생각을 가진 공무원들은 위로 갈수록 승진이 어려워진다.

반면 일을 벌이지 않고 시키는 일만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하는 공무원은 위험이 적다. 그렇게 영혼을 팔아먹은 채 청와대가 시키는 일만 잘해도 승진하고 요직에 앉을 확률이 높아진다.

정권 말, 손에서 일을 놓은 채 대선판을 기웃거리는 고위 공무원들이 많다. 나라 곳간은 대책 없이 비어가고, 세제는 누더기가 되는데 ‘No’라고 말하는 공무원은 보이지 않는다. 대선 후보들이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최소 30년 임기의 공무원들은 바른말 하기보다 두 후보 중 누가 돼야 내 인사에 이득이 있나 주판알만 튕기고 있다. 그들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사명은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2분의 1 확률에 베팅하는 데 여념이 없다.

대표적인 게 기획재정부다. 기재부는 세제와 예산을 총괄한다. 가계로 치면 가장의 수입과 지출을 합리적으로 조정해 나라 가계부를 건전하게 유지시키는 게 의무인 부처다. 레임덕 시기라고 하지만 최근 기재부의 행태는 해도 해도 심하다. 당장 내년 보유세를 정하는 기준인 공시지가를 무력화한다는 말도 안 되는 공약이 현실화될 분위기인데, ‘곳간지기’라고 자처했던 기재부 공무원은 이에 동조하고 있다. 수장인 홍남기 경제부총리조차 강원도지사 후보가 물리적으로 어려워지고 현 정부의 ‘순장조’가 된 이후로는 반항하는 ‘액션’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올해 세수 전망을 10조원이나 펑크 내 국가 재정에 큰 혼란을 일으킨 책임자는 괜찮은 공공기관장으로 내정되자 쓴소리를 하는 하급자들의 입단속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 고위 공무원은 “요즘 장차관들을 보면 국민들을 보살필 생각은 안중에도 없고 위만 쳐다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 정부 5년 동안 인사를 뒤돌아보면 열심히 소신을 지키고 할 말을 했던 공무원은 대부분 물을 먹거나 옷을 벗었다고 한탄했다.

내년 3월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할 것이다. 일 안 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 고위 공무원들은 새 정부 들어 펼쳐질 승진 잔치를 잔뜩 기대하고 있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지 차기 정부 첫 공무원 인사는 위가 아닌 국민을 생각하면서 일했던 소신 있는 이들이 중용됐으면 좋겠다. 그게 두 후보가 강조하고 있는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제대로’ 된 사회일 것이다.

이성규 경제부장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