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된 ‘비커밍 김정은’(Becoming Kim Jong Un)이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은 워싱턴 최고의 북한 전문가가 쓴 김정은 분석서로 관심을 끌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자료를 바탕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가계도와 성장사, 권력 승계 과정, 통치·외교 전략 등을 보여준다.
저자 박정현(47·미국명 정 박)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올해 초 새로 출범한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로 발탁됐다. 동아태국은 동아시아 외교를 총괄하는 부서다. 박정현은 미국 정보당국에서 오랜 기간 북한 담당 분석관으로 일했다. 2009년 CIA에 합류했고 국가정보국(ODNI) 동아시아 담당 부정보관, 국가정보위원회(NIC) 부국장,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 등을 지냈다.
박정현이 북한 정보 분석가로 일해온 시기는 김정은이 20대의 젊은 지도자로 등장해 대내외적으로 권력을 공고히 해온 시기와 겹친다. 김정은 통치는 이달로 10년이 됐다.
저자는 김정은의 10년을 내부적으로 권력 세습을 완성하고 국제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시기로 평가한다. 김정은은 집권 초기 6년 동안 문을 잠근 채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 기반을 다지고 핵무기를 실험했다. 2012년 7월 북한 군부의 실세인 리영호를 전격 해임하고 2013년 12월 고모부 장성택을 잔혹하게 처형했다. 2017년에는 이복형이자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을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암살했다. 동시에 미국 등 국제사회의 압박을 견디며 핵과 탄도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김정은은 다양한 사거리의 신형 탄도 미사일과 잠수함 발사 미사일 등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발사했던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세 배 많은 미사일을 실험 발사했으며, 북한의 6차 핵실험 중 네 차례를 모두 35살이 되기 전에 감행했다.”
2018년 초 김정은은 갑자기 외교로 방향을 튼다. 북한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발사와 사상 최대 규모의 6차 핵 실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설전으로 제2차 6·25전쟁 발발 위험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이후 세계가 주목한 가운데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저자는 “적절할 때 방향을 전환하고 전술을 바꾸는 것이 김정은의 탁월한 능력”이라며 “그는 최대 압박을 가하는 데 능했을 뿐만 아니라, 최대 관여에도 노련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외교와 도발 사이에서 정교하게 줄타기를 하며 모호성과 아첨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그의 능력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지난 10년간 김정은은 20대 애송이가 국가를 통치할 수 있을까, 국제 제재의 올가미에 눌려 경제가 빈사 상태인 북한이 곧 붕괴되지 않을까, 미국과 전쟁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진짜 핵무기를 포기하려나, 북한이 개방으로 나아갈 것인가 등 여러 의문들을 통과해왔다. 이 과정에서 김정은은 정적을 제거하는 잔인한 독재자의 면모와 인민의 곁으로 다가서는 새로운 리더십을 교차하며 보였다. 미국을 향해 핵무기를 휘두르는 모습과 “새로운 시대”를 언급하며 북미 관계의 개선 가능성에 낙관론을 불러일으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호성 때문에 김정은에 대한 해석은 엇갈리고 있다.
저자는 김정은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핵무기를 든다. 김정은은 2018년 신년사에서 “(2017년은) 국가 핵 무력을 완성하고 세계가 보는 앞에서 그 확실한 성공을 증명하는, 위대하고 역사적인 명분을 얻은 한 해였다. 우리 공화국은 마침내 어떤 힘도 어떤 것도 되돌릴 수 없는 강력하고 믿을 만한 전쟁 억제력을 갖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저자는 “김정은의 뻔뻔함과 높은 위험 감수성은 그가 이미 진전된 핵무기 프로그램을 갖고 집권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며 “지금은 북한의 전략적 무기가 김정은 그 자체를 상징하는 개인적인 정체성이 되었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외교로 선회한 배경에 대해서도 핵무기 보유를 달성한 북한이 이제 경제 발전 쪽으로 눈을 돌리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이는 트럼프의 강경 발언과 최대 압박 정책이 김정은을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해석들과 다르다. 김정은이 비핵화를 포기하고 정상국가를 추구한다는 견해와도 다르다.
저자는 “핵 프로그램 완성을 선언한 김정은이 자신의 정통성과 유산을 뒷받침하는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오히려 그의 아버지 때보다 적어 보인다”고 분석한다. “북한을 둘러싼 모든 불확실성과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은 분명하다. 핵무기는 그의 권력을 단단히 하고 김씨 왕조의 영생을 보장하는 핵심 요소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유산과 김씨 왕조의 운명을 전부 핵무기에 걸었다.”
일부의 낙관적인 기대와 달리 북한 비핵화는 쉽지 않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더구나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을 이용해 공격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위험성도 있다. 비핵화를 위해서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는 카드도 고려할 수 있을까. 저자는 “북한에 대한 선제 군사 공격은 비핵화와 김정은의 반성 대신 역효과를 낳을 게 뻔하다”며 “핵전쟁에 불을 붙이고, 미국에 비싼 정치적·경제적 대가를 안길 가능성이 농후하며, 동아시아 지역과 국제사회에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북한 비핵화의 실마리는 여전히 북한의 국제적 고립과 내부적 취약성에 있다. 김정은은 지난 10년간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들었지만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다. 저자는 “핵무기가 (자산이 아니라) 자신의 통치와 체제 보존에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믿게 하는 방향으로” 국제적 개입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책은 김정은 통치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특징으로 사이버 전력과 퍼스트 레이디를 들고 각각 한 장을 할애해 소개한다. 저자는 “김정은은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라며 과학기술을 자기 브랜드의 일부분이자 권력을 유지하는 핵심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김정은은 중국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등 최소 8개국에 약 6000명의 해커와 사이버 지원 인력을 두고 있다. 북한판 실리콘밸리와 미래과학자거리를 조성해 기술 엘리트들을 우대하고 있다.
‘평양의 퍼스트 레이디’ 리설주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김정은은 집권 초기부터 부인을 공개했고 외교 무대에도 동반했다. 이는 북한을 서구 세계에 개방하는 쪽으로 이끌 것이라는 낙관론을 불러일으켰다. 리설주의 이미지는 독재자와 독재국가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하는 효과를 낳았고, 내부적으로도 번영하고 개방적인 미래에 대한 약속처럼 비치고 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