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45) 시인은 최승자(69)를 조상처럼 여겨왔다고 한다. 자기 시의 피가 최승자로부터 흘러왔다고 혼자서 생각해왔다. 그렇게 자유롭게 생짜의 언어로 시를 쓸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중학생 시절 인천의 어느 서점에서 최승자 산문집을 본 게 처음이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라는 책이었다. 자기를 말하면서 ‘게으른’이라고 해도 안 부끄러운 거구나, 그래도 되는구나 하는 걸 처음 알았다.
중학생, 대학생 때 산 최승자 산문집 두 권을 그는 이사를 다니면서도 보물처럼 챙겼다. 최승자의 시집은 유명하지만 산문집은 찾는 이가 없어 출간 직후 절판되고 말았다. 최승자의 산문집이 나왔는지 모를 정도였다.
출판사 대표가 된 김민정은 2014년 정신과 폐쇄병동에 있는 최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의 산문집을 다시 내고 싶다는 얘기에 최승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거 잡스러운 글이에요. 고쳐야 돼요.” 2019년 11월 이른 아침에 김민정은 최승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역시 병원이었다. “나 최승자예요. 그때 얘기한 산문집 두 권, 그거 내줘요.”
그렇게 해서 올 연말 최승자 산문집 두 권이 도착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1989년 처음 출간된 지 32년 만의 재출간이다. 기존 책에 수록된 산문 25편에 1989년 이후 발표된 6편을 새로 찾아내 추가한 증보판이다.
‘어떤 나무들은’은 1995년 출간된 책이니 26년 만에 다시 살아난 셈이다. 이 책에는 ‘최승자의 아이오와 일기’라는 부제가 달렸다. 94년 8월 미국 아이오와대학에서 주최하는 인터내셔널 라이팅 프로그램(IWP)에 참가하게 돼 생애 첫 외국 여행을 떠난 최승자가 현지에서 5개월을 지내며 적은 일기다.
30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살아난 최승자의 산문집들은 뜨겁게 읽히고 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초판 2000부가 이틀 만에 다 팔렸고 현재까지 6쇄를 찍었다. ‘어떤 나무들은’은 재출간 열흘도 안 돼 3쇄에 돌입했다. 김민정은 책을 최승자에게 보내고 통화를 했다. 독자들 반응이 너무 좋다고 전하자 최승자는 “사람들이 나를 아나요”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두 산문집 표지에는 최승자의 얼굴 사진이 각각 실렸다. 2009년 잡지 GQ와 인터뷰 때 찍었던 사진으로 담배를 피는 모습과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다. 최승자는 이 표지에 매우 흡족해하면서도 담배 피우는 사진을 써도 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김민정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요, 선생님. 최승자인데요.”
존재도 알리지 못한 채 사라진 책이 30년 만에 다시 출판되고 루머처럼 이름만 떠돌던 1980년대의 시인을 2020년대의 독자들이 다시 읽는, 최승자 산문집을 둘러싼 현상은 분명 이례적이다. 여기에는 최승자의 글이 가진 현대성이 작용한다. 최승자의 산문은 지금 읽어도 생생하고 조금도 촌스럽지 않다. 각 글 끝에 적힌 연도를 자꾸 다시 보게 된다. 세월에 바래지 않는 힘은 무엇보다 솔직함에서 나온다. 남들 눈치 안 보고 자기를 감추거나 꾸미지 않고 기존의 관념이나 가치에 갇히지 않는다. 김민정은 “최승자는 자신을 다 걸고 쓴다. 그건 최승자가 최고다”라고 말했다.
최승자 글이 현대성을 띠는 이유는 그가 매우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태도를 가진 데다 여성주의와 생태주의를 깊게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첫사랑에 훌륭하게 실패했다”거나 “담배와 커피와 외로움과 가난과 그리고 목숨을 하루종일 죽이면서 나는 그대로 살아 있기로 한다” 같은 문장에서 보여주는 유머와 낙차 역시 현대적이다.
최승자는 79년 등단해 8권의 시집을 내고 ‘자살의 연구’ 등 20권 이상의 책을 번역했다. 93년 무렵 발병한 정신질환이 평생 그를 괴롭혀왔다. 그는 재출간 산문집의 교정도 보지 못했다. “한 줄도 읽을 수 없고 한 줄도 쓸 수 없다”고 자신의 병세를 전했다. 김민정은 다음 달 최승자 시집 ‘연인들’(1999년)을 재출간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