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창 22:14)
내가 좋아하는 이 말씀은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는 구절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도대체 이 캄캄한 절망의 밤에 과연 누가 나를 도울 수 있을까, 그 막막한 때에 문득 눈을 들어 바라보니 바로 저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좋은 것으로 준비하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지난 세월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이 말씀을 되뇌면 안심되며 주님께서 아주 가까이에 계신 듯 안도하곤 했다. 삶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칠 때, 절망이 엄습하고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 홀로 이 말씀을 되뇌며 도우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곤 했다. 우리 집에서는 문 열면 관악산 봉우리가 보이는데 가끔은 구름에 가리운 그 산이 시내산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 산을 보며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고 중얼거리면 하나님의 임재가 아주 가까이 느껴지곤 한다. 그렇게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세 번쯤 조용히 되뇌면 대부분 두려움 근심 걱정의 검은 구름이 지나가고 햇살이 쫘악 비치는 것 같은 경험을 여러 번 했다.
1989년 초겨울 책을 쓰다가 고시원의 한 골방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돼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2007년에는 택시를 탔다가 기사가 졸음운전을 하는 바람에 오른팔이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건강하던 동반자가 암 선고를 받았고 그 후 27일 만에 천국으로 떠나갔다. 홀로 치른 큰아들의 결혼 이틀 만이었다. 천둥 벼락처럼 휘몰아치는 이런 일들을 겪어내며 문득 세라비(C’est la vie·이것이 인생이다)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와 함께 내공 비슷한 것도 생겨났는데 그 내공이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8)과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일 또한 역전의 하나님께서 선한 쪽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나도 모르는 나의 날을 새롭게 준비해 열어주시리라는 내밀한 믿음에서 생겨난 것이다. 나는 기도의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났다. 내 삶 자체는 비틀거리며 걸어온 것이었지만 이슬비에 옷 젖듯 지금도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은 어머니의 웅얼거리는 기도에 완악한 내 삶도 이제는 서서히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얼마 전 내가 뒤늦게 한 작은 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다. 장립 이후 여호와의 산에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언젠가 늙고 굽은 허리로 인생의 석양을 건너면 입술로만 되뇌던 그 산에 몸으로 닿게 될 것이다.
<약력> △서울대 명예교수(동양화) △가천대 석좌교수 △서울대 미술대학장·미술관장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기독문화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