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님, 저 법정 안 나가면 안 됩니까. 피고인과 마주치기 겁나는데….”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을 변론하는 한 변호사는 최근 피해 여성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일이 잦다. 피고인이 반대신문을 요구하면 직접 법정에 출석해야 하는데, 피해자들은 이에 대해 극도의 스트레스를 호소한다고 한다.
이 변호사는 “법정에 가림막 등이 있어 가해자와 마주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달래보지만 쉽지 않다”며 “심리적으로 위축돼 제대로 진술을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재경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방청석에서 피고인 가족들이 ‘어디 한마디만 해봐라’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그 상황 자체가 피해자에겐 고통”이라고 했다.
문제는 내년부터 형사사건 피해자와 목격자 등 사건 관계인이 법정에 불려가는 일이 더욱 잦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피고인 방어권을 강화하는 조치들이 시행되면서 법원이 사건 파악을 위해 관련자를 소환하는 경우가 더 늘게 된다는 것이다. 우선 내년 1월 1일 이후 기소된 사건은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수사기관 진술 내용(피의자신문조서)이 법정에 제출되지 않는다. 조사 과정을 촬영한 영상녹화물도 증거로 쓸 수 없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피고인신문과 증인신문 강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에 헌법재판소가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수사기관 영상녹화물에 증거능력을 부여하던 성폭력처벌법 조항을 지난 23일 위헌으로 결정하면서 미성년 피해자가 법정에 서야 하는 일도 불가피해졌다. 기존 재판에선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채택할 수 있어 미성년 피해자의 법정 진술은 드물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28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미성년자라도 적법하게 피해 상황을 진술했다면 재차 법정에 불러 질문하지 않겠다는 것이 기존의 법 취지였다”며 “앞으로는 미성년 피해자가 피고인과 판사 앞에서 사건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법조계 안팎에선 이 같은 변화가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방어권이란 헌법적 권리를 강화하는 조치들의 일환이라고 본다. 하지만 새로운 형사사법제도가 시행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2차 가해의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나온다.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물에 대한 위헌 결정에 반대 의견을 냈던 이선애 이영진 이미선 재판관은 “피고인의 반대신문권 보장이 중요한 요소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입는 현상을 방지해야 할 공익 또한 매우 중대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인 양진영 변호사는 “국내에서 성범죄 등 형사 피해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시행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며 “수사·재판 과정의 절차적 문제를 보완하면서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제도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