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년 불혹 K리그 도움왕… “은퇴? 이제 시작”

입력 2021-12-29 04:07
수원 삼성 염기훈이 구단과 내년까지 계약을 연장했다. K리그 통산 도움 110개로 역대 최고 도움왕인 그는 프리킥 득점도 역대 공동 1위다. 이번 시즌까지 수원에서만 392경기에 출장해 종전 1위 이운재를 뛰어넘었다. 염기훈이 지난해 8월 29일 부산 아이파크와 경기에서 득점한 뒤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마흔인 ‘왼발의 마법사’ 염기훈(38)의 연말은 바빠 보였다. 코로나19 때문에 예년보다 더 가족과 오랜 시간을 보낸 그는 통화 직전까지 아내와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운동하러 가지 않고 집에 머무르니 아이들이 유독 좋아한다며 웃었다. 아들을 축구교실에 데려다 줘야 한다며 다시 나설 채비를 하는 그는 흔히 볼 법한 30대 후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이지만, K리그에서 그는 현재진행형 ‘전설’이다. 그는 리그 통산 110도움을 기록해 이 부분 역대 1위다. 2위 이동국이 77개인 걸 고려하면 당분간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염기훈은 지난 22일 수원과 재계약을 하며 다음 시즌까지 뛰기로 했다. 그는 닷새 뒤인 27일 국민일보와 통화하며 “수원은 제게 집이나 다름없다”며 “떠난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할 정도로 수원이 좋다”고 했다.

염기훈이 수원에 입단한 건 2010년이다. 내년이면 13년차다. 그보다 수원에 오래 있는 선수는 한 살 아래 수비수 양상민뿐이다. 그는 수원 팬들이 홈구장 ‘빅버드’(수원월드컵경기장의 애칭)에 걸개로 내거는 ‘이 사랑에 후회는 없다’는 문구를 자주 인용한다. 팀 성적이 좋을 때는 그만큼 행복하다는 의미지만, 팀이 어려울 때는 힘들어도 함께한다는 의미다.

염기훈은 수원에서 3차례 우승컵을 들었다. 모두 국내 컵대회인 FA컵이다. 그가 입단한 시기는 하필 수원이 리그 대표 강자 자리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시기와 겹쳤다. 지난 시즌 강등 위기에서 허우적대던 수원은 올 시즌 전반기 엄청난 기세로 리그 우승까지 넘보는 듯했지만 후반기 맥없이 꺾였다. 파이널A(상위스플릿)에 턱걸이해 잔류경쟁에 휘말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염기훈은 이번 시즌이 팬들을 돌아오게 할 적기였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입단 때만 해도 팬들이 경기장에 매번 꽉꽉 찼다”면서 “전반기 성적이 좋았을 때 예년처럼 입장이 가능했다면 많은 팬이 돌아왔을 텐데, 선수들도 더 힘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고 했다. 그는 “어린 선수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엄청난 팬이 있는 팀인 걸 알려주고 싶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예전이 너무 그립다”고 했다.

지난 3월 21일 홈구장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400경기 출장 기념 팻말을 들고 있는 모습.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선수 생활 황혼기지만 염기훈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선수 은퇴 뒤 지도자 생활이나 창업 등에 따라붙는 ‘제2의 인생’ 이야기가 아니다. 선수로서 완전히 다른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다. 지난달 21일 대구 FC와 경기에서 구단 통산 최다 출전기록을 경신했을 때 들은 말이 크게 다가왔다. 함께 선수로도 뛰었던 김대환 골키퍼 코치가 해준 조언이었다.

“대환이 형이 축하해주길래 ‘오래 있으니 기록도 세우네요’ 했어요. 그랬더니 형이 ‘뭘 오래 해, 이제 시작이야’라면서, ‘남들이 세운 기록 이제 깼으니 지금부터 시작이지’ 하더라고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 해봤거든요. 이제 은퇴할 때 됐다, 언제 은퇴하든 괜찮은 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말 들으니 정말 다르게 생각되더라고요. 나이 많은 저한테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 왠지 새롭고 맞는 말 같고.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그에게 새로운 시작이란 새로운 역할을 의미한다. 이번 시즌 그는 주로 교체선수로 뛰었다. 프로 생활 이래 주전을 놓친 적이 드물었기에 벤치가 낯설었다. 몸 관리도, 마음가짐이나 팀 내 역할도 달라야 한다는 걸 시즌이 지나며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는 “갑자기 변화를 맞다 보니 처음엔 힘들었다”며 “이번엔 교체선수로서 후배들을 도와주며 궂은일을 할 자세로 준비할 테니까 다음 시즌이 더 기대된다”고 했다.

염기훈의 올 시즌 목표 중 하나는 ‘80골-80도움 클럽’ 달성이다. 물론 그보다 절실한 목표는 선수경력 내내 이루지 못한 리그 우승이다. 은퇴 뒤에는 지도자가 꿈이다. 전성기를 이끈 은사 서정원 감독이 모델이다. 그는 “그때 감독님을 보며 많이 배웠다. 저렇게 스승과 제자 이전에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 서로 신뢰를 쌓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축구장 밖에서도 그의 삶은 바쁘다. 자신의 이름을 건 축구교실을 경기도 화성 동탄에서 운영하고 있다. 처제의 남편이 총감독을 맡아 전국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 ‘차범근 축구교실’처럼 좋은 선수를 배출하는 게 목표다. 축구를 하는 아들에게도 종종 프리킥을 알려준다. 아들은 ‘아빠는 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놀아줘야 한다’며 선을 긋지만 프리킥만큼은 한 수 접고 배운다. 그는 “재능이 있다. 수비수로 키우려 한다”며 웃었다.

수원 구단에는 팬이 많다. 염기훈에게도 개인 팬클럽인 ‘염기훈월드’ 식구들이 있다. 동생이나 다름없는, 오래된 친구들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할 말을 묻자 염기훈은 “죄송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는 “다음 시즌에는 전반기 좋았던 모습을 유지하도록 베테랑으로서, 맏형으로서 선수들을 다독이겠다. 팬들이 더 많이, 오래 웃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할 테니 응원해달라는 얘기를 꼭 전해달라”고 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