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에선 하루 1350명가량이 코로나로 사망한다. 시간당 56명, 대략 64초에 1명씩 죽는다. 작년 3월 팬데믹 시작 때부터 누적 사망자를 따져도 대략 ‘70초에 1명꼴’이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14개월여 만에 ‘부양 책임자’였던 부모나 조부모를 잃은 아이가 미국에서 14만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두 달 전 나왔다. 코로나 특성상 죽음은 느닷없이 찾아왔고, 그로 인해 생긴 삶의 불확실성은 아이들에게 다양한 정신건강 문제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는 게 임상심리학자의 분석이었다. 별안간 고아가 된 현실은 이런 분석 없이도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낸다. 죽음은 남은 자들의 마음을 후벼 판다.
이들의 바로 윗세대도 코로나 죽음의 음침한 기운에 사로잡혀 있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정치연구소는 30대 미만 성인 4명 중 1명이 ‘최근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요즘 며칠간 우울하거나 절망적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전반적 견해를 묻는 질문에 젊은이 55%가 ‘두려움’이라고 답했다. 팬데믹이 자신을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답이 과반이었다.
팬데믹 장기화는 인류 전체에 심각한 정신건강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연령·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뉴욕타임스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이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는 일이 잦아 상당수 정신건강센터가 압도당하고 있다고 지난주 보도했다. 자살률 통계는 아직 집계되기 전이지만 우려스럽다는 걱정이 기사에 담겼다. 워싱턴포스트는 거의 2년간의 코로나 사태가 집단적 트라우마를 일으켰고, 많은 사람이 한계점에 다다랐다고 썼다.
“많은 분이 부엌 식탁의 빈 의자를 바라봐야 하는 성탄절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처음이고, 누군가는 벌써 두 번째일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얼마나 피곤하고, 걱정스럽고, 좌절하는지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심정을 압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주 백신 접종을 강조한 오미크론 대응 대국민 연설을 이렇게 시작했다. “제발 백신을 맞으라. 그게 애국”이라는 말은 상실감에 빠진 국민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시작한 호소였다. 그의 연설을 듣고 백신 회의론자 중 몇 명이나 마음을 바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통령직의 의미는 곱씹어볼 만하다. 국민의 절망에 공감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중대사를 설득해 거버넌스를 실현하는 것, 대통령직은 그런 자리다.
한국에서도 많은 삶이 침전하고 있다. 얼마 전 정부가 방역지침을 다시 강화하자 자영업자들이 ‘정말 죽어야 끝나는 거냐’며 거리로 나와 울부짖었다. 그런 사례가 실제 알려진 것도 부지기수다. 고립이 길어지면서 발달장애 아이의 퇴행을 매일 지켜본다는 부모의 울음소리도 여전히 들린다. 올 들어 지난 10월까지 한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벌써 1만714명(잠정치)이다. 셧다운을 해서라도 전염병 확산세를 어떻게든 빨리 진정시켰으면 좋겠다는 사람과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사람이 서로 비난한다.
같은 나라 국민이고 모두 피해자인데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슬픔과 갈등을 모른 체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방역 조치를 다시 강화해 송구하다”는 메시지를 대변인이 대독하게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참모가 읽은 ‘자영업자의 상실감’이란 문구는 무미건조할 뿐, 대통령의 마음과 표정이 읽히지 않는다. 당일 문 대통령이 호주 순방 피로로 ‘입술이 붓고 터진 상태’였다는 것도 뒤늦게 참모의 SNS에서 알았다. 순방 성과를 다투는 일은 코로나 블루에 시달리는 국민에겐 딴 나라 얘기 같다.
전웅빈 워싱턴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