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분노보다 다정함을

입력 2021-12-28 04:08

연말 연초 주말에 읽을거리로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샀다. 진작 제목만으로도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다윈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에 빗댄 원제 ‘Survival of the Friendliest’를 ‘가장 친절한 자의 생존’ ‘가장 상냥한 자의 생존’처럼 무미건조하게 뽑지 않은 것이 주효했달까.

책은 약육강식, 즉 가장 힘세고 덩치 큰 것이 아니라 친화력이 좋고 협력할 줄 아는 쪽이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기술 좋은 사냥꾼에 근육질이었던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한 것은 10~15명의 작은 무리였던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100명 이상 큰 무리를 이뤄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많은 적을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많은 친구를 만들었기에 살아남았다는 설명이다.

책에는 개 여우 침팬지 보노보원숭이 등 실제 사례가 가득한데, 머릿속에 떠오른 건 마블의 히어로 중 한 명인 헐크였다. 잘 알려진 대로 헐크의 힘의 원천은 분노다. 브루스 배너 박사가 “난 언제나 화가 나 있거든(I’m always angry)”이라고 말하며 헐크로 변신해 외계인 군단을 날려버리는 장면은 마블 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하이라이트 중 하나일 것이다. 헐크는 ‘어벤져스’에서 히어로 사이에서도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해 아이언맨이 적에게 “우리에겐 헐크가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세월이 흐르면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는 타노스에게 흠씬 두드려 맞고, 나중엔 헐크가 변신을 거부해 배너 박사가 슈트를 입고 전투에 나서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코믹 캐릭터가 돼버렸다. 배너 박사의 두뇌와 헐크의 힘이 하나가 돼 ‘스마트 헐크’로 등장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는 아이들의 사진 요청에 웃으며 응하면서 엄마 말씀 잘 들으라고 잔소리하는 순둥순둥한 동네 아저씨가 됐다.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던 헐크가 ‘친화력 갑’ 수다쟁이가 된 셈인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설명을 적용하면 동물적 본성인 공격성을 억누르고 자제력과 감수성, 소통 능력을 발달시키는 사회화 과정을 밟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변화를 캐릭터의 성장으로 볼지, 매력이 반감되는 기존 설정의 붕괴로 볼지 의견은 갈릴 수 있겠지만 말이다.

올해 나온 책 중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와 짝이 될 만한 것으로 ‘공감은 지능이다’가 있다. 이 책에서도 공감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는 기술이자 인류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희망적인 것은 공감 능력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연습을 통해 키울 수 있고, 그 결과 우리는 더 친절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인생 드라마였던 ‘동백꽃 필 무렵’의 주인공 동백이도 이런 말을 했다. “전 사람들한테 다정하고 싶어요. 다정은 공짜니까요. 그냥 서로 좀 친절해도 되잖아요.” 미혼모라 거부당하고, 외지인이라 핍박받던 동백이도 결국은 그의 다정함과 진심이 통해 드라마는 사랑도 이루고 마을 공동체까지 회복되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더랬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은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고 한 박노해 시인의 시에서 멈췄다.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동안/ 등 뒤의 슬픔에 등 뒤의 사랑에/ 무심했던 시간들을 돌아보자… 내 그립고 눈물 나고 사랑하는 것들은/ 다 등 뒤에 서성이고 있으니/ 그것들이 내 등을 밀어주며/ 등불 같은 첫 마음으로/ 다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니/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분노와 혐오가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12월의 남은 며칠은 등 뒤의 사랑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그리고 조금 더 다정한 새해를 맞으시기를 빈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