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955년 작품 ‘재능 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는 당대의 심리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소설 속 주인공 리플리가 여태껏 보지 못한 캐릭터여서다. 리플리는 자신이 창조한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일삼는 인물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살인 등의 범죄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크게 히트를 쳤다. 1960년 처음 영화화 된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는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고, 1999년 맷 데이먼 주연의 ‘리플리’로 리메이크 됐다.
허구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뜻하는 용어 ‘리플리 증후군’은 여기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을 ‘재능 있는 신씨(The Talented Ms. Shin)’란 제하의 기사로 보도하면서 이 용어가 널리 회자됐다. 이후 국내에서도 신정아 사건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 ‘미스 리플리’가 제작됐다.
연이은 학력·경력 위조 논란에 휩싸인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후보 부인 김건희씨가 마침내 대국민사과를 하며 자세를 한껏 낮췄다. ‘진학을 위해 사용한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고 했던 초기 대응과는 다른 태도다. 김씨는 몇몇 의혹에 대해 허위와 과장을 인정했다. 그러나 선거대책위원회를 통해서는 한국게임산업협회 재직증명서 위조 의혹 등을 부인하며 뒤끝을 남겼다. 아직 억울한 게 많은 듯하다. 그래서 대국민 사과는 짧고, 대남편 사과는 길었던 모양이다.
남편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만 않았어도 김씨 허위 이력이 까발려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부 고위직 인사 때마다 청와대 검증 시스템이 도마에 오르곤 했는데 사회의 검증 시스템 또한 허술하긴 마찬가지다. “큰 지우개가 있다면 모든 걸 지우고 싶다.” 영화 ‘리플리’에서 주인공이 내뱉은 대사다. 김씨의 지금 심정이 이럴 거다.
이흥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