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미안한 마음이 화해·통합의 미래 열어

입력 2021-12-28 03:03

2002년 6월 한·일 월드컵이 한창일 때, 미군 장갑차량에 효순과 미선 두 여중생이 압사당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1월 말 가해자들은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한국 법정이 아니라 미군 법정에 섰고 무죄판결을 받았다. 온 국민의 감정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서울에서 시작된 촛불집회는 전국으로 확산했다.

필자는 당시 경기 송탄시(현재는 평택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송탄은 미 공군기지가 있는 도시이고, 부대를 중심으로 유흥가가 늘어서 있는 관광특구이기도 하다. 우리 교회에도 미군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 성도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 분노와 슬픔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조건 미군 편을 들다가 빈축을 사는 성도도 있었다. 젊고 경험이 없던 나는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마음만 산란할 뿐 무슨 설교를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 교회 성도 가운데 케빈이라는 미국인이 있었다. 공군 비행기 수리 기사로 부대에 근무하는 민간인이다. 신실한 루터교 가정에서 자라났고 한국에 와서는 죽 우리 교회에 출석하며 집사 직분을 받았다. 교회에서 한국인 여성을 만나 결혼해 딸 둘을 낳았다. 케빈은 미국인 특유의 너그러움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어서, 인근 보육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도 하고, 홀몸노인들의 집수리를 해 주는 등 선행을 많이 베풀었다. 2002년 성탄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그가 부탁했다. 성탄절 예배 때 자기가 성도들에게 할 말이 있으니 시간을 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러라고 했다.

성탄절 아침이 됐다. 설교 후 약속대로 그가 강대상으로 걸어 나오는데 속으로 겁이 더럭 났다. 혹시 실언해서 성탄절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은 아닐까. 그가 말문을 열었다. 자신은 효순 미선 사건 때문에 너무 가슴이 아프고, 미군들이 무죄판결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없고, 한국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미국인을 대신해 사과한다며 “아이 엠 쏘리”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는, 한국식으로 허리를 굽혀 성도들에게 절을 했다. 옆에서 통역하는 내 눈에서도 눈물이 났다. 나는 그를 붙잡고 포옹했고 모든 성도들은 일어서서 손뼉을 쳤다. 내 마음에 사진처럼 저장된 이 천국의 순간은 꺼내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화해는 미안한 마음에서 시작되고, 미안한 마음은 자신이 가해자임을 인정하는 데서 생겨난다. 케빈은 자신의 미안한 마음을 눈물의 사과로 보여주었는데, 이는 자신이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해자와 동일시한 데서 출발했다. 이런 행동은 은총의 깊은 의미를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미안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통해 화해와 통합의 미래가 열린다. 예컨대 나는 젊은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는 기성세대는, 정치인이든 교회 지도자이든, 미래 코리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미안한 마음의 반대는 억울한 감정이다. 자신이 직접 피해를 본 경우에 억울한 생각이 들어 이를 바로잡으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문제는 과도한 피해의식이다. 조상들의 피해의식을 물려받기도 하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입은 작은 피해들을 모두 더해 자신이 큰 박해를 받는 것처럼 피해자 행세를 하기도 한다.

때로 나보다 큰 행운을 쥔 사람에 관해 억울해하기도 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집을 살 수 없는 사람이 억울한 것은 물론, 집값이 오르지 않은 지방에 사는 사람도 억울하고, 집값이 강남 4구에 비해 덜 오른 사람도 억울하고, 집값이 많이 오른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야 해서 억울하다. 억울한 마음이 지옥이고, 억울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 그들이 만드는 세상이 헬조선이다.

장동민(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