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선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들어서는 2주간을 바비레따로 부른다.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여서 5번째 계절로도 불린다. 러시아에서 중년 여성에게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찬사다. 젊은 시절보다 더 화사하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2012년 1월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바비레따)라는 제목의 관객참여형 공연이 처음 선을 보였다. 권태감과 우울감에 시달리는 중년 여성을 대상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이 공연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이 작품은 무용계에선 드물게 초연 이후 전국 28곳에서 74회나 공연됐다. 오는 30~31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바비레따, 열 번째 계절’은 ‘바비레따’의 10년 여정을 돌아보고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바비레따’가 지금까지 계속될 수 있었던 데는 초연부터 지금까지 공동안무를 맡고 출연도 해온 안무가 장은정(57·장은정무용단 대표) 최지연(57·창무회 대표) 김혜숙(53·김혜숙댄스리서치그룹 대표)과 배우 강애심(59·극단 고래 단원) 등 4명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춤추는 여자들’이란 이름의 프로젝트그룹을 결성한 이들은 타악 연주자 조민수와 함께 춤판을 벌여 왔다. 지난 23일 아르코 대학로극장에서 만난 ‘춤추는 여자들’은 ‘바비레따’가 이렇게 긴 생명력을 지닌 작품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2005년 무렵 제가 해오던 현대무용 작업에 지치고 회의를 느꼈던 것 같아요. 당시 무용계의 이슈였던 ‘무용의 대중화’와 관련해 관객과 소통이나 교감 문제도 고민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과 종종 만나서 고민을 나눴어요. 2011년 제가 연극 ‘살’을 통해 배우 강애심씨를 만나면서 ‘바비레따’가 점차 구체성을 띠게 됐죠.”(장은정)
‘춤추는 여자들’은 2011년 8월 제10회 춘천아트페스티벌의 제안으로 춘천의 중년 여성들과 워크숍을 진행했다. 20분 남짓의 ‘당신은 지금 봄내에 살고 있군요’를 만들며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바비레따’의 닻을 올렸다.
“당시 춘천에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30~50대 여성 20명과 함께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공감하게 됐죠. 날것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으면서 인위적이지 않은 그들의 춤에 뒤통수를 맞은 듯했어요.”(김혜숙)
본격적으로 공연을 계획한 이들은 이듬해 초 아르코 예술극장의 스튜디오 다락을 대관했다. 전형적인 공연장 대신 개성 있는 장소가 공연에 어울린다고 판단해서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를 화두 삼아 진행된 초연은 일주일 내내 입장 인원을 제한해야 할 정도로 관객이 많이 왔다.
“지금도 첫 공연이 기억나요. 솔직히 ‘바비레따’를 5~6년 정도 했을 땐 힘들기도 했는데, 매번 공연이 시작되면 힘든 걸 잊어버리게 돼요. 이 작품은 관객들의 참여로 완성되는데, 매번 관객이 달라서 새로운 공연이 된다는 게 성공의 키워드인 것 같아요.”(최지연)
‘바비레따’는 초연 이후 입소문을 타고 전국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영 바비레따’도 진행했다. 여타 공연과 달리 후불제(공연 관람 후 원하는 만큼 지불)를 채택했지만, 늘 예상을 뛰어넘는 금액이 들어왔다.
“‘바비레따’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관객들 덕분이에요.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은 관객만이 아니라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강애심)
‘바비레따’는 무대와 객석이 구분된 일반 공연 형태를 벗어나 출연진과 관객이 함께 어울리고 함께 호흡하는 게 큰 매력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손을 잡고 춤을 추다 보면 해방감과 동시에 위로를 얻게 된다.
“‘바비레따’는 춤을 통한 치유를 지향하는 장소특정형 공연입니다. 초연 때는 관객이 참여하는 공연이 많지 않아서 커뮤니티 댄스의 ‘시조새’로 평가받게 됐죠.”(장은정)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도 ‘바비레따’는 꾸준히 공연됐다. 지난 2년간 끈을 이용한 비접촉 버전, 온라인을 이용한 비대면 버전을 통해 관객과 만났다. 과거에는 출연자와 관객이 손잡고 춤판을 벌였다면 비접촉 버전에선 고무줄을 붙잡는다. 장은정 등 ‘춤추는 여자들’은 “팬데믹 이전처럼 손을 직접 잡진 못하지만 여전히 서로의 감정을 느끼며 소통할 수 있었다”면서 “이번 10주년 공연은 팬데믹으로 답답한 일상을 보내는 상황에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담았다”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