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얼마 전 한 언론으로부터 ‘내 인생의 책’을 소개하는 글을 의뢰받고 별 망설임 없이 5권을 골랐다. 공교롭게 그가 고른 책은 모두 가계부채 문제나 경제 위기,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은 것들이었다. 주변에선 “문학 작품 같은 책도 하나 넣으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지만 고 위원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인생의 책을 고르라는 건데, 내 인생이 영향을 받은 건 모두 ‘위기’와 관련된 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표적 금융위기 역사를 기록한 ‘광기, 패닉, 붕괴’를 시작으로 ‘내러티브 경제학’ ‘행동하는 용기’ 등이었다. 고 위원장이 고른 책 중에서 그나마 덜 무거워 보인 ‘행동하는 용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의 한 주역인 벤 버냉키 전 미국 연준 의장의 회고록이었다.
고 위원장은 집무실에서 만난 관료 후배들에게도 이런 책을 종종 권한다고 한다. 금융위 한 관계자는 26일 “처음엔 가계부채 정책과 관련한 고 위원장의 소신 있는 발언에 반신반의했는데, 이제는 그 진정성을 확실히 알게 됐다”며 “고 위원장은 가계부채 확신범”이라고 평했다. 국회 인사청문회 모두발언 때부터 고 위원장은 “첫째, 급증한 가계부채가 금융시장 안정을 훼손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다만 금융당국 수장의 일관되고 꼿꼿한 소신은 유연성 없는 금융 규제의 진원지로도 지목된다. 최근 시중은행의 대출금리가 급등하면서 서민 전용 대출 상품까지 막히는 등 대출 한파가 몰아친 배경에는 세심한 정책적 배려를 못 갖춘 가계대출 억누르기만 있었다는 것이다.
금융권 한 인사는 “고 위원장이 내정된 순간부터 강도 높은 가계부채 규제는 예고된 것이었고 그 방향에는 동의한다”면서도 “정책 추진 과정에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는 너무나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