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기사 스크랩이 사라진다면

입력 2021-12-27 04:02

‘가리사니’ 필진에 이번에 합류했습니다. 코너명이 익숙지 않아 찾아봤습니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은 ‘가리사니’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가리다’에서 나온 말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지각, 사물을 판단하는 데 기초가 되는 실마리를 일컫는 말.” 예문으로는 ‘가리사니를 잡을 수 없다’는 표현이 있는데 ‘일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금 제가 그렇습니다.

지난 13일부터 산업부에서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산업부는 기업과 업계 소식을 전합니다. 기자 생활을 한 지 12년이 됐지만 기업을 담당한 건 처음이라 지금 저는 당최 가리사니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업부는 그동안 거쳤던 부서들과 사정이 조금 다른 듯합니다. 책 ‘나쁜 저널리즘’을 보면 현직 기자이면서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인 저자는 23가지 나쁜 저널리즘 중 하나로 산업부를 꼽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철모르는 새내기 산업부 기자가 조금은 낯선 눈으로 기업을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서 의아하다고 느꼈던 걸 적은 글입니다.

이곳에 와서 가장 생소하다고 느낀 건 보도자료의 양입니다. 우리 회사가 이번에 ○○인증을 획득했는데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거다, 회사 대표이사(CEO)가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이건 이런 의미다, (아직 시작은 안 했지만) 조만간 획기적인 사업을 추진할 거다, 회사 임직원들이 봉사 활동을 했다 등등. 이런 내용의 보도자료가 하루에도 수두룩하게 들어옵니다. 그리고 대부분 마지막 문장엔 ‘기사화를 부탁드린다’고 적혀 있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걸 독자들이 관심 있어 할까’였습니다. 정부가 국가 정책을 국민에게 설명할 때 보도자료를 사용하듯, 기업도 자사 홍보를 위해 보도자료를 배포합니다. 정책은 국민과 직접적 관련이 있지만 기업 임직원들이 봉사 활동한 얘기는 기업 구성원조차 관심 없을 것 같은데 왜 이걸 알리려 할까, 의아했습니다. 아무도 안 보더라도 기록할 게 있고, 많이 읽힐 것 같더라도 쓰면 안 될 기사는 분명 존재하지만 이건 조금 다른 얘기입니다. 모든 보도자료가 그런 건 아니지만 애초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적이 아닌 보도자료도 적지 않습니다. 홍보가 아닌 보도 자체가 목표인 것이죠. 특히 홍보대행사의 경우 보도자료를 한 달에 몇 개 배포했는지, 이 중 보도는 몇 번이나 됐는지가 성과 지표인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 홍보팀 A씨는 “홍보는 정성 평가가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기업이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그걸 토대로 보도되는 기사들을 보면 뭐랄까, 대중 혹은 독자는 빠진 ‘그들만의 리그’처럼 느껴졌습니다.

기업 홍보팀 B씨는 “불특정 다수 대중이 아니라 업계 관계자나 투자자들에게 기업 활동을 알리기 위한 측면이 있다”고 했습니다. 100% 공감합니다. 한편으론 그렇다면 보도자료를 여기저기 다 뿌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업 홍보팀 C씨는 “당장 보는 사람은 없더라도 언론 검증을 거친 기사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기업 신뢰가 생기고 회사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포털 검색을 해보면 검증 없이 보도자료 ‘복붙 기사’가 난무하는 지금의 언론 상황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건지 의아했습니다.

기업 홍보팀 D씨는 “공감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부정당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기업 홍보를 하는 분들의 업무와 성과를 부정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다만 회사 관련 기사를 모아 CEO에게 보고하는 스크랩이 사라지더라도 지금이랑 똑같을까, 만약 그렇다면 언론은 지금 같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업이 언론을 통해 홍보하는 행위와 언론이 가치 있는 기업 기사를 발굴해 보도하는 건 결국 같은 굴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홍보(Public Relations)의 대상은 CEO가 아니라 대중(Public)이고, 기사의 대상은 기업이 아니라 독자여야 우리의 일이 더 가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이용상 산업부 기자 sotong203@kmib.co.kr